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메리 바라 GM CEO는 각각 어떤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까. 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각 사가 발표한 BSM(Board Skills Matrix, 이사회 역량 구성표)을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이 방법에도 한계는 있다. BSM 작성자는 기업이고 작성 방식도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에 BSM을 구성하는 역량 항목은 기업마다 다르다. 완성차를 생산·판매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 사의 역사, 환경, 목표 등에 따라 이사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역량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BSM만으로 어떤 리더가 더 뛰어나다는 식의 판단은 비약이다. 하지만 리더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BSM만큼 유용한 정보도 없다.
현재 현대차는 자사 홈페이지에, 테슬라와 GM은 연례 주주총회가 열리기 전 공시하는 'Proxy Statement(위임장 성명서)'에서 BSM을 공개하고 있다. 테슬라와 GM은 이달 위임장 성명서를 공시하며 최신화한 BSM을 공개했다.
◇정의선 회장, 리더십과 산업 등 5가지 역량 보유…'미보유' 법률은 다른 이사에 의존 총 6가지 역량 항목으로 구성된 현대차 BSM 가운데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역량은 총 5가지다. △리더십 △회계·재무·경영 △산업·기술 △글로벌 역량 △ESG다. 정 회장이 보유하지 못한 유일한 역량은 '법률·정책'이다.
정 회장의 학력과 경력에서 법률·정책은 연관성이 가장 떨어지는 분야다. 1970년생으로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경영학 석사를 졸업한 정 회장은 2005년 기아 사장을 시작으로 CEO 역할을 맡기 전까지 구매와 영업, 기획 부문에서 일하며 경영 수업을 받았다. CEO로 활동하면서부터는 디자인과 첨단 IT기술에 대한 관심과 전문성을 보이며 그룹을 크게 변화시켰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정 회장이 애플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전했다. 디자인과 첨단 IT기술에 대한 관심이 애플에 대한 주목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바퀴 달린 스마트폰'으로 자동차가 진화해가는 점을 고려하면 이 분야들에 대한 리더의 관심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현대차는 정 회장이 갖지 못한 법률·정책 분야의 전문성을 다른 이사들로 채우고 있다. 사외이사 7명 가운데 4명이 법률·정책 분야 전문가다. 낮지 않은 비율이다. 현대차의 사업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고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올라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분야와 지역의 법률·정책에 해박한 전문가들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이상승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공정거래위원회 경쟁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심달훈 우린조세파트너 대표이사는 중부지방국세청장을 역임했다. 장승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마지막으로 최윤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중앙노동위원회 심판위원을 역임했다. 노동 이슈는 대규모 생산시설과 인력을 유지하는 현대차에 중요하다.
◇'유일한 창업 경험' 머스크 CEO, 정의선 회장과 동일하게 '법률' 전문성 미보유 완성차 업계를 넘어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이목을 사로잡는 인물인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리더십 △재무·투자 △기술 △사이버 보안 △성장·변화 △상장사 이사회 경험 △ESG △글로벌 운영 △생산·공급망 △전략 기획 △정보 보안과 개인정보 보호 등 11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됐다.
1971년생인 머스크 CEO는 미국 펜실베니아대 물리학과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동생이자 현 테슬라 이사인 킴벌 머스크와 함께 온라인 도시정보 서비스 업체인 'Zip2'를 설립한 뒤 매각해 약 300억원을 거머쥐었다. 이후 투자와 창업을 반복하며 테슬라뿐 아니라 페이팔(전자결제 금융사), 스페이스X(항공우주장비 제조 업체), 솔라시티(태양광에너지 업체) 등에서 CEO와 이사회 의장 등을 지냈다. 2022년에는 트위터(현 X)를 직접 인수했다.
이처럼 머스크 CEO의 이력은 '자동차 회사' 하나만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롭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메리 바라 GM CEO가 각각 현대차그룹과 GM에서 여러 직무를 맡으며 차근차근 성장한 점과 분명한 차이점이다. 창업 경험과 이민자(머스크 CEO는 남아공 출생) 출신이라는 점도 머스크 CEO를 다른 리더들과 구분짓는 지점이다.
다양한 기업에 투자하고 근무했지만 머스크 CEO도 전문성이 부족한 영역이 있다. 테슬라는 그가 '리스크와 통제', '법률과 규제 및 공공정책'에 대한 전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했다. 정의선 회장이 유일하게 보유하지 않은 역량도 법률·정책이다. 머스크 CEO도 해당 분야들에서 경험을 쌓은 적은 없다.
테슬라도 현대차처럼 머스크 CEO의 부족한 전문성은 다른 이사로 채우고 있다. 일례로 아이라 에렌프라이스(Ira Ehrenpreis) DBL파트너스 관리파트너는 테슬라 이사 가운데 유일하게 머스크 CEO가 갖지 못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다. 에렌프라이스 관리파트너는 현재 전미벤처캐피털협회(NVCA)의 이사회와 집행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고, 전미재생에너지연구소(NREL) 자문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미국 재생에너지위원회에서도 근무했다.
◇'현장 출신' 바라 CEO, 마케팅·사이버 분야 전문성 부족…테슬라 임원 출신으로 보충 지난해 전 세계 판매량 기준 상위 5개 완성차 업체는 토요타그룹, 폭스바겐그룹, 현대차그룹, 르노·닛산·미쓰비시, GM이다. 이 가운데 여성이 CEO인 곳은 GM뿐이다. 이 점만으로도 메리 바라 CEO는 훗날 자동차 산업 역사를 말할 때 언급될 만한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약 10년간 CEO로 재직하고 있다.
여성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바라 CEO는 1980년 GM 인턴으로 입사해 2014년 CEO에 오른 점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녀는 생산현장의 엔지니어로 출발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회사 지원으로 스탠포드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경영학을 공부했다. 이후 개발, 구매, 공급망 등 여러 부서를 경험하며 경영자로서 능력을 키웠다. 그녀의 아버지도 GM에서 40년 가까이 근무한 엔지니어로 GM은 그녀의 인생이다.
GM은 지난 24일 발표한 BSM에서 바라 CEO가 △상장사 CEO 경험 △산업 △생산 △기술 △리스크 관리 △재무 △ESG 등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다고 보고했다. 여기서 상장사 CEO 경험은 바라 CEO가 디즈니 이사회 일원으로도 활동하는 점을 가리킨다.
다만 GM은 바라 CEO가 마케팅과 사이버 분야에서 전문성은 갖고 있지 않다고 알렸다. 머스크 CEO가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점과 다른 점이다. 전기차 전문 제조사로서 테슬라가 자율주행을 위한 차량 소프트웨어 개발 부문에서 업계를 선도하는 점이 양사 CEO의 보유 역량 차이와 관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마케팅과 사이버 보안 분야에서 바라 CEO의 부족한 전문성을 보완하는 이사 중 한 명은 조나단 맥닐 DVx벤처스 CEO다. 맥닐 CEO는 경쟁사인 테슬라에서 글로벌 판매, 배송 및 서비스 사장을 역임했고 차량공유 서비스 업체인 리프트(Lyft)에서 최고운영책임자(COO)로도 근무했다. GM은 그에 대해 "비즈니스 모델과 소프트웨어, 사이버 분야에서 전문 지식을 보유하고 있고 전기차 분야에서 입증된 리더"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