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쇄신하고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은 '인사'에 달렸다. 재계 10대 그룹 총수일가 구성원들도 새로운 자리를 맡거나 직급이 오르는 등의 변화를 겪는다. 다만 이들 모두가 경영 의사결정 핵심기구인 이사회로 진입하는 건 아니다.
최근 1년간 자산 상위 10개 기업집단 창업주 일가의 취임·승진 사례 24건을 조사한 결과 이사회에 합류하지 않은 '미등기임원'으로 기재된 경우가 18건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했다. 새로운 직책을 가장 많이 맡은 인물은 한화그룹 '오너 3세'이자 김승연 회장의 삼남 김동선 한화 건설부문 해외사업본부장으로 나타났다.
◇새 직책 맡은 총수 2인방 '최태원·김승연'
THE CFO는 지난해 3분기 보고서와 올 3분기 보고서 내용을 대조하면서 재계 10대 그룹 총수 일가의 직책·직급 변화를 살폈다. 총자산 상위 기준으로 △삼성 △SK △현대차 △LG △롯데 △한화 △HD현대 △GS △신세계 △CJ 등 10개 기업집단을 선별해 조사했다. 소유분산기업에 해당하는 포스코(5위)와 KT(12위), 동일인이 농협중앙회로 돼 있는 NH농협금융그룹(10위)은 집계 대상에서 제외했다.
지난 1년 동안 새로운 자리에 취임하거나 승진이 이뤄진 사례는 24건으로 나타났다. 신규 선임 18건, 직급 상향 6건으로 구성됐다. 이사회 합류 여부로 구분하면 미등기임원이 18건으로 전체의 75%를 차지했다. 신규 선임, 보직 변경, 승진을 단행하면서 사내이사로 등기된 경우는 6건(25%)에 불과했다.
그룹 총수 가운데 새로운 직책을 맡은 인물로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최 회장은 올 9월 솔리다임(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즈) 사내이사 겸 이사회 의장에 취임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이 팽창하는 흐름에 부응해 사업을 추동하는데 한층 힘을 싣겠다는 의지가 내포됐다.
솔리다임은 2021년 당시 SK하이닉스가 11조원을 들여 인텔의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인수해 세운 미국 자회사다. 이전에는 SK 대표이사 회장 외에도 SK이노베이션·SK하이닉스·SK텔레콤 등 3개사에서 회장(미등기) 직책을 겸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회장으로 위촉됐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등 글로벌 정세가 급변하는 국면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 해외 사업기반 확장에 기여하는 취지가 반영됐다. 김 회장은 지주사 한화를 필두로 △한화시스템 △한화비전 △한화솔루션에서도 회장직을 수행 중이다. 다만 모두 미등기임원으로 기재돼 있다.
올해 신세계그룹 총수 일가의 승진도 돋보였다. 앞서 3월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총괄회장으로,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그룹 회장으로 승진했다. 이어 10월 말 백화점, 이마트부문의 계열 분리 선언과 맞물려 정유경 ㈜신세계 총괄사장도 ㈜신세계 회장으로 승진했다. 승진 이후에도 모친 이명희 신세계그룹 총괄회장은 총수 역할을 계속 수행한다.
◇HD현대 '3세' 정기선, 오일뱅크·사이트솔루션 부회장 겸직
창업주 일가 3세 인물 중에서는 정기선 HD현대 부회장의 '수석부회장' 승진이 눈길을 끈다. 2023년 11월 당시 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영전한지 1년 만에 직급이 한 단계 더 올랐다. HD현대중공업 선박해양영업본부 담당 부회장 직에서 물러난 대신 HD현대오일뱅크·HD현대사이트솔루션 부회장(미등기)에 취임했다.
정 수석부회장의 계열사 부회장 겸직에 대해 HD현대 관계자는 "조선 부문을 넘어 그룹 성장동력 외연을 넓히는데 힘쓰겠다는 의지"라며 "건설 중장비 제조, 정유 등 그룹내 다른 사업 영역까지 책임경영 실천을 강화하겠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한화그룹 오너 3세를 둘러싼 인사도 활발하게 진행됐다. 김승연 회장의 장남 김동관 한화 전략부문 대표는 한화임팩트 투자부문 대표(사내이사)를 겸하기 시작했다. 특히 셋째 아들 김동선 한화 건설부문 해외사업본부장의 직책 변화가 두드러졌다. 작년 3분기 말에만 하더라도 한화갤러리아 신사업전략실장,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략부문장(전무)만 수행하는데 그쳤으나 올 들어 겸임하는 직책이 6개로 대폭 늘었다.
올 1월 한화 본부장 선임을 시작으로 하반기 들어서는 △갤러리아 △호텔앤드리조트 △모멘텀 △비전 등 4개사에서 미래비전총괄 임원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김 본부장은 이들 기업의 이사회 구성원이 아니다. 이외에도 미국 햄버거 브랜드 '파이브가이즈'를 운영하는 에프지코리아 글로벌전략담당, 아쿠아플라넷 전략부문장을 잠시 맡았으나 물러났다.
다른 그룹을 살피면 허윤홍 GS건설 미래혁신대표 겸 신사업부문대표는 올 3월 주주총회를 거쳐 대표이사 겸 신사업본부장 직책을 달았다. 동시에 사내이사로 이사회에 입성했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지주 미래성장실 전무는 올 상반기에 롯데바이오로직스 글로벌전략실장 겸 사내이사로 부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