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알게 되면 저도 좀 알려주세요."
애플이 회사채를 찍는 이유를 수소문하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국내 대기업 금융팀장에게 받은 부탁이다. 지난해 말 연결 기준(이하 동일)으로 순현금 540억달러를 들고 있는 애플이 회사채를 발행하는 재무 전략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애플이 밝힌 조달 이유는 주주 환원 재원 마련이다. 투자설명서에 회사채로 조달한 자금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쓰겠다고 기재해뒀다. 자본총계가 줄어드는 주주 환원을 부채인 회사채 발행 자금으로 지급하는 사례는 국내에선 보기 드물다.
애플의 현금흐름을 봐도 회사채 발행 이유가 선뜻 납득되지 않는다. 애플은 지난해(9월 결산 기준) 영업활동현금흐름으로 1222억달러를 벌어들였다. 주주 환원(1050억달러)과 유형자산 취득(107억달러)을 소화할 수 있는 현금 창출력이다. 자회사에 쌓여 있는 유보금을 배당 등으로 회수하면 외부에서 조달 활동을 펼치지 않아도 될 재무 여건이다.
당장 자금 소요 여부가 아니라 꾸준하게 현금흐름을 확보하려는 차원으로 바라봐야 비로소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달 비용을 지불하고 유동성 리스크를 회피하는 행위에 가깝다. 주기적으로 만기를 분산해 회사채를 발행하면 재무활동으로 일정 수준의 현금흐름을 담보할 수 있다. 경기, 업황에 따라 오르내리는 영업활동현금흐름 변동성을 보완하는 방파제를 쌓아두는 셈이다.
애플은 주로 장기물을 발행한다. 가장 최근(지난해 8월)에는 55억달러 규모 공모채를 찍었다. 만기별 발행 금액은 △7년물 10억달러(이자율 3.25%) △10년물 15억달러(3.35%) △30년물 17억5000만달러(3.95%) △40년물 12억5000만달러(4.1%)였다.
기존에 발행해둔 회사채도 만기를 고르게 분산해뒀다. 지난해 말 발행 잔액(1118억달러) 중 53%(593억달러)가 2028년 이후에 만기가 돌아온다. 올해부터 2027년까지는 매년 100억달러 안팎으로 만기 물량이 나눠져 있다.
루카 마에스트리 애플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회사채 시장을 십분 활용해 조달 전략을 짠다. 애플은 신용등급이 AAA급인 기업(마이크로소프트, 존슨앤존슨) 중에서도 활발하게 회사채를 찍는 곳이다.
애플도 2007년 아이폰을 내놓기 전까지 맥(Mac), 아이팟을 만들던 평범한 전자 제품 업체였다. 1997~1998년에는 당기순손실을 내기도 했다. 부침을 이겨낸 뒤 지금에 이르렀다.
올해 국내에서는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조 단위 자금을 계열사에서 끌어오고 있다. 삼성전자는 자회사 삼성디스플레이에서, LG디스플레이는 최대주주인 LG전자에서 차입을 일으켰다. 금리 인상 파고를 넘어갈 조달 전략을 골몰하는 CFO들이 연결 실체 내 자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매년 회사채 시장을 찾는 애플의 케이스를 한 번쯤 곱씹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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