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텔'의 어원은 독일어다. 동일 업종의 기업이 경쟁의 제한 또는 완화를 목적으로 가격, 생산량, 판로 따위에 대하여 협정을 맺는 독점 형태를 말한다. 담합의 다른 표현이다.
최근 카르텔은 다른 의미로 쓰인다. 특정 집단이 이익을 지키기 위해 뭉치는 모습을 카르텔이라고 부른다. 어감처럼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인다. 마약 카르텔과 같은 범죄 행위를 일컫기도 하고 의사 카르텔, 검사 카르텔, 사교육 카르텔 등 집단 이기주의를 부르는 대명사다.
자본시장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현은 '재벌' 카르텔이다. 카르텔의 원래 의미처럼 재벌들간 협정을 맺는다면 당장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받을 일이다. 재벌 카르텔은 오너들끼리 상호간 백기사 역할을 자처하며 경영권 방어를 위해 서로 돕는 행태를 짚는 표현이다.
과거 대기업 경영권 분쟁이 생기면 어김없이 카르텔이 등장했다. 백기사 역할은 대부분 다른 재벌이 맡았다. KCC는 삼성이 헤지펀드 엘리엇으로부터 공격을 받자 백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엘리엇의 공격은 무위로 끝났고 삼성은 경영권을 방어했고 KCC는 자본 이득을 취했다.
금호그룹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엔 SK와 CJ가 지원에 나섰고 한진그룹은 GS LX의 지원을 받았다. 과거 SK도 소버린 사태에서 카르텔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외국 헤지펀드의 공격이나 해외 기업의 적대적 M&A는 카르텔의 단골 코드였다.
재벌 카르텔은 경영권 방어수단이 부족한 한국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경영권의 향방을 남의 손에 맡기는 선택은 쉽지 않다. 백기사를 자처하고 들어온 투자자가 갑자기 돌변해 경영권을 침탈하려 하는 일도 많다. 그럼에도 선택해야 하는 독이 든 성배다.
재벌 카르텔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신흥 재벌들이 나타나면서다. IT나 바이오 등 기술로 성장한 신흥 재벌들은 기존 재벌들과 코드가 달랐다. 경영권보다 확장이 더 중요했다. 지분율 희석을 개의치 않는다. 초기부터 지분을 넘기고 투자를 받는 일이 흔했다. 지분 승계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대주주 지분율은 이미 한자릿수다.
상호간 경영권 분쟁도 서슴치 않는다. 게임업계 빅3라 불리는 엔씨와 넥슨간 경영권 분쟁은 과거 재벌 카르텔에선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다. SM엔터의 경영권 분쟁에 카카오가 참전해 경영권을 뺏은 사건도 재벌 카르텔의 코드와 다른 결이다.
최근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분쟁은 재벌 카르텔의 균열이 정통 재벌 사이에서도 나타났다는 데 상징성이 있다. 두 가문이 동업 관계를 깨겠다고 나선 것부터 카르텔이 깨졌다. 창업 세대의 동업 관계를 '각자도생'으로 바꾸겠다는 후세대의 반란이다.
우호 세력들이 참전을 하지 않거나 최소한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화나 현대차 등은 고려아연의 우호 세력으로 꼽히지만 경영권 분쟁 과정엔 본격적인 참여를 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플레이어들이 주포란 점이 눈에 띈다. 고려아연 영풍 경영권 분쟁은 MBK와 베인캐피탈 등 사모펀드의 '돈'이 주력 무기다. 경영권 분쟁을 위해 서로 사모펀드의 힘을 빌리고 있다. 증권사의 이름이 오르내려도 재벌 이름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사모펀드의 참전을 두고 여론의 시선은 좋지 않다. 돈만 밝히는 냉혈한들이 경영권을 빼앗아 국부를 유출할 것이란 정치권의 지적도 많다. 사모펀드의 참전은 카르텔을 깨는 작업을 한다. 담합의 부작용을 해소하고 자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기업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일을 한다. 사모펀드가 경영권을 인수하면 기업 가치가 몇배씩 뛰어오르는 것은 자본시장과 돈의 개입이 가져온 순기능이다.
고려아연과 영풍의 경영권 분쟁이 어떤 모습으로 끝날지는 미지수다. 한쪽이 승리할 수도 있고 극적인 화해를 하거나 정부 개입으로 봉합될 수도 있다. 어떤 결론이 나든 이번 사건은 카르텔이 또 한번 흔들린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카르텔이 깨진 만큼 담합의 비효율을 대신해 자원 배분의 효율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싶다. 경영권 분쟁으로 자본 시장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대 효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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