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유자산 10조원, 주식 부호 2위의 미국 출장길이다. 캐리어 두개를 들고 1박에 200달러짜리 '작전상황실'을 찾았다. 침대 하나, 책상 하나가 있는 비즈니스맨들이 머무는 평범한 호텔 방이다. 그 곳을 작전상황실이라 불렀다. 전세계 임직원을 화상 회의로 연결했다. 바이어들과 통화를 하고 다음날 회의 준비를 했다. 미국법인에 누구를 앉히고 유럽 법인에 누구를 보내고 인사까지 했다.
10조원 사나이는 잠을 깊이 못 잤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쪽잠을 잤다. 노트북으로 드라마를 켜 놓고 잠이 든다. 그래야 잠깐 자고 일어나기 편하다. 밤이건 새벽이건 현장을 연결해야 했다. 작전상황실에서 숙직을 하고 회의를 하고 컵라면을 먹고 차를 마셨다.
어느 정도 연출도 있고 과장도 있었을 게다. 값비싼 식사를 하고 고급 호텔에 머물 날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삶에선 고됨이 묻어났다.
몇 해 전 행사장에서 그를 마주친 적이 있다. 목소리에 힘이 느껴졌고 자신감이 묻어 났다. 세상 어떤 일이든 마음 대로 할수 있다는 에너지를 느꼈다. 카리스마는 여전해 보였지만 건강한 에너지가 많이 줄었다. 아침마다 약을 한웅큼 먹었다. 다리에 근육이 다 빠져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고 말했다. 걸을 때 휘청대고 오래 서 있으면 직원들이 부축을 할 정도다. 자산 10조원은 명예이자 운명이다. 나를 위해선 돈을 쓸줄 몰랐다. 주식은 팔수 있는 게 아니다. 본인은 '팔자'라고 말했다.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의 미국 출장기를 유튜브 동영상에서 보여준 장면들이다. TV 드라마나 영화에선 재벌들의 모습이 화려하게 묘사된다. 온갖 권모술수를 쓰고 회사를 뺏고 빼앗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는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재벌의 삶은 사뭇 다르다. 초 단위, 분 단위로 일정을 소화한다. 몇주전, 몇달전부터 미팅들이 예정돼 있다. 식사 자리는 대개 비즈니스 미팅이다. 필요한 경우 한 끼니에 두세번 식사를 한다. 시간이 남으면 임직원들을 만나야 하고 명절때는 해외 법인을 방문해 격려해야 한다. 자기만의 시간은 찾기 힘들다.
매일매일이 고뇌의 연속이다. 순간의 판단을 해야 하고 회사의 명운이 걸린 결정을 해야 한다. 1조짜리 M&A 딜에 사인을 해야 한다. 마지막 한끗을 올리냐, 마느냐는 온전히 본인의 몫이다. 그 판단 하나로 딜이 깨지고 성사된다. 딜이 성사되고 끝난게 아니다. 제값을 주고 산건가, 비싸게 산건 아닌가 점검해야 한다. 업황이 고꾸라지면 그 돈을 날린다. 쪽잠은 커녕 잠이 오질 않는다.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아야 쪽잠을 잔다.
재벌들은 각종 송사에도 시달리는 법이다. 나라에서 올림픽을 지원하라며 돈을 내놓으라기에 기부를 했는데 정권 교체에 탄핵, 청문회가 이어지더니 옥살이를 해야 했다. 매년 단골로 국정감사 증인으로 불려 나가기 십상이다.
가정사도 그냥 가정사가 아니다. 이혼 소송으로 회사를 쪼개야 하는 지경이 왔다.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은 '구성원들의 명예와 긍지'다. 수없이 많은 M&A를 하며 회사를 키워왔다. 순간순간 피를 말리는 결정이었다. 모두가 반대하는 반도체 회사를 인수해 지금의 캐시카우를 만들었다. 그 결정의 순간들은 무시되고 비자금으로 큰 회사가 됐다.
현실 속 재벌의 삶은 고되다. 개인의 영달만을 위한다면 지분을 매각하고 손을 놓으면 그만이다. 명예이자, 운명, 팔자차럼 재벌들은 회사를 키워 왔다.
재벌을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그들의 고뇌와 노력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을 대기업이 이끌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걸음 더 성장하기 위해서도 재벌의 역할을 인정해 줘야 한다. 그게 '기업가 정신'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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