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
취재원과의 미팅 자리에서 책을 선물받았다. 요즘 같은 동영상 시대에 책 선물은 드물다. 책을 직접 산지도 참 오래 됐다. 회사에서 만든 책을 훑어 보는 게 고작이고 여행갈 땐 소설책 한권 정도 들고 나가면 다행이다. 인문서, 게다가 회고록을 선물받으니 참 생뚱 맞다.
짬이 날 때 몇장 넘겨보다 끝장까지 넘겼다. 소소한 일상부터 거창한 얘기들까지 담담하게 써 내려간 책은 술술 읽혔다. 70세 넘은 창업주가 인생을 반추하며 남긴 글이다. 사업 초기 힘들었던 고생담, 사업을 확장하던 순간순간의 기억들, 수천억원을 들여 M&A에 나섰던 고뇌의 순간이 담겨 있다.
철학적이고 거창한 내용은 별로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구를 가르치려는 내용도, 훈계하는 논조는 더욱 아니다. 화려한 미사여구가 없는 담담한 글이 더 와 닿았다.
이민가방 3개에 가득 샘플을 담고 미국 땅을 밟았다가 세관과 실랑이를 하며 고생했던 순간부터 위험천만한 남미 국가들에 진출했던 에피소드들, 수 많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책에 담겼다. 자랑꺼리 뿐 아니라 실패와 실수들도 담겨 있다. 약간은 부족한 모습들에서 오히려 진정성이 느껴졌다.
책의 저자는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이다. 단돈 500만원으로 회사를 일궈 글로벌 1위 의류 OEM 업체로 키워낸 장본인이다. 태림포장과 쌍용건설 등 굵직한 M&A까지 성사시켜 지금은 매출 10조원의 중견그룹으로 거듭났다. 세아란 이름은 첫째 딸 세연과 둘째 딸 진아의 이름을 땄다.
김 회장의 책을 새삼 소개하는 것은 유명 기업인의 '기록'을 간만에 봤기 때문이다. 한국 재벌들은 기록에 박한 편이다. 내부적으론 다양한 기록을 남겼을 지 몰라도 이를 외부에 공개하는 경우가 드물다.
기억에 남는 기록은 창업 1세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 이병철 회장은 '호암자전'을 남겼고 고 정주영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란 자서전을 남겼다. 고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한 때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혔다.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는 짧게는 70년, 길게는 130년 넘었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의 시작은 1886년이지만 자본주의가 꽃을 피운건 한국전쟁 이후라 봐야 한다.
그동안 경박단소에서 중후장대로 제조업의 시대가 있었고 IT 산업의 시대를 지나 금융과 자본시장의 시대가 지났다. 몇 세대가 흐르는 동안 창업 1세대들은 자서전이라도 남겼고 2세대들은 인터뷰라도 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일간지에 남긴 '생각 좀 하며 살자'란 칼럼은 글 자체도 명문이고 지금 읽어도 머리를 탁 치는 혜안을 느낄 수 있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괴팍하기로 유명했던 스티브 잡스도 생전에 인터뷰를 하며 자서전을 남겼다. 나이키 창업자인 필 나이트가 남긴 슈독이나 맥도널드 창업자의 레이크록의 자서전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다. GE는 제프 이멜트나 잭 웰치와 같은 전문 경영인들도 자신의 인생과 회사에 대한 글을 남겼다.
한국 기업인들의 기록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더욱이 IT 세대를 거치며 스타CEO들의 목소리를 듣기는 더 힘들다. 카카오와 네이버는 이제 대기업의 반열에 올랐지만 김범수 이해진의 목소리와 메시지는 재판장이나 국정감사장에서나 들으면 다행이다. 오너들은 입을 닫고 전문 경영인들은 오너들의 눈치를 본다. 사진 기자에게 쉿 하며 입을 닫은 '밈'이 나올 정도다.
한국의 경제가 성장한 것에 비해 여전히 기업인들의 스타성은 부족하다. 글을 남기고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본인 PR 뿐 아니라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글을 남기기 힘들다면 최소한 인터뷰에라도 응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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