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에선 외국인 투자 동향을 주요 데이터로 본다. 외국인도 여러 집단으로 이뤄져 있을 텐데 대개 비슷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대형 펀드를 운영하는 투자자들이 대형주에 대한 매수를 일정 기간, 상당한 규모로 진행하면 코스피지수에도 영향을 미친다.
외국인 투자자들의 판단은 한국 기관 투자자들보다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다. 저평가 기업을 발굴해 '밸류업' 시키는 선구안이 상당히 좋았다. 외국인 지분율이 높은 기업의 주가는 더 높게 형성되곤 했다. 수급도 있겠지만 외국인의 이름 값도 한 몫한다.
외국인이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도 컸다. 소위 '소버린 사태'는 한국 자본시장에 큰 충격이었다.
재벌은 오너가 경영하는 게 상식이었다. 소버린이란 이름의 헤지펀드가 2003년 4월 SK의 지분 14.9%를 확보해 SK그룹의 경영권을 탈취하려 했다. 재벌 해체와 지배구조 선진화란 명분을 내세운 거창한 명분이었지만 일개 헤지펀드였다. 소버린은 2년여 만에 1조원 넘는 이익을 얻고 한국에서 물러났다.
소버린 사태가 가져온 충격은 컸다. 재벌의 주인이 헤지펀드에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정부도, 대기업들도 부랴부랴 정책을 바꾸고 지배구조를 정비했다.
현대자동차가 업그레이드된 데에도 외국인의 이름이 있었다. 정의선 회장의 리더십과 기술 경영 등 다양한 요인이 중첩돼 있겠지만 루크 둥커볼케 사장이 가져온 변화도 하나의 변곡점이었다. 둥커볼케는 제네시스 브랜드를 런칭한 2015년 합류해 현대차 디자인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 제네시스 최근 모델의 두줄 짜리 헤드램프도 그의 작품이다.
이사회 중 가장 선진적으로 운영되는 곳 중 하나는 현대글로비스다. 9명의 이사회 멤버 중 2명이 외국인이다. 얀예빈왕(67)사외이사와 타나카 조나단 마사스웨(39) 기타비상임이사가 재직 중이다. 얀예빈왕 이사는 2대주주인 노르웨이 해운사 빌헬름센에서 나온 인물이고 타나카 이사는 3대 주주 칼라일에서 파견된 임원이다.
두명의 외국인 덕에 현대글로비스 이사회는 긴장의 연속이다. 글로벌 해운사와 투자그룹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 의사 결정은 쉽지 않다. 물론 쟁쟁한 이력의 한국 국적 임원들도 많다. 최근엔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전 회장이 합류했다. 이런 이사진을 설득하기 위해 안건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노르웨이까지 가서 이사회를 갖기도 하고 몇시간 토론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반면 외국인 이름값이 부정적인 사례들도 많다. 헤지펀드들이 M&A를 한 뒤 배당으로 자금을 빼간 일에선 어떤 긍정적 메시지도 찾기 힘들다. 기술만 빼가고 먹튀한 일들도 많았다. 엘리엇이란 이름의 벌처펀드가 남긴 유산은 '국부유출' 외엔 없다. 어설픈 행동주의 펀드들의 폐해도 나열하기 힘들다.
외국과 한국을 구분하는 게 무의미한 시대에 살고 있다. 서울은 국제 도시가 됐고 외국인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BTS와 아이브는 글로벌 레벨에서 통한다. 한국은 웬만한 유럽 국가들보다 더 잘 사는 선진국이다. 외국인 이름값만큼 한국인들도 이름값을 대접받기 시작했다.
외국인이란 이름값을 맹신할 필요도 없고 외국인이라고 배척할 필요도 없다. 다양성을 키우고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누구든 제 값을 주고 쓰면 된다.
한국석유공사는 최근 동해 유전 시추의 명분을 얻기 위해 외국인 이름을 빌려왔다. 국내 교수가 이 역할을 했으면 지금보다 비난이 적었을까. 비토르 아브레우란 이름이 제 값을 할까. 먼 훗날 다시 곱씹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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