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엘리베이터는 오랜 기간 적대적 M&A 위협에 시달려온 곳이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장기적으로는 회사를 성장시키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닥쳤을 땐 우호주주를 찾으며 사태를 수습해왔다.
하지만 정작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세력들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KCC로 대표되는 고(故) 정상영 KCC 명예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을 ‘정씨’가 승계해 정통성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가져오려 했다. 쉰들러는 한국 시장에서 못다 이룬 꿈을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실현코자 했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잠시 한 배를 탄 현대엘리베이터와 우군들은 결국 악연으로 마무리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엘리베이터에 반복된 경영권 다툼은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오랜 격언을 확인케 한다.
◇고 정상영 회장, 현대그룹 정통성 일념…백기사에서 경영권 분쟁자로
현대엘리베이터는 2000년대 초반 현대그룹의 지배구조를 담당하는 핵심 계열사였다. 현대그룹을 이어받은 고 정몽헌 회장은 전자 분야 외 엘리베이터 사업에 관심을 두고 회사를 성장시켰다. 하지만 2003년 대북 불법송금 사건 수사를 받던 정 회장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되고 현대엘리베이터는 이후 격랑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8월 4일 정몽헌 회장 사망 후 8월 8일부터 10일까지 외국 펀드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11.48%를 취득했다. SK가 소버린사태를 겪은 직후였기에 시장과 현대그룹은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 위협 세력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에 고 정상영 KCC 명예회장을 주축으로 범 현대 계열사들이 현대그룹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뭉쳤다. 정상영 회장은 '왕자의 난' 이후 소원해진 가족들을 불러모아 ‘이번 건은 가족들이 공동으로 나서 대처하자’고 독려했다. KCC가 가장 많은 지분을 매입했고 현대백화점, 현대시멘트, 한국프랜지 등 5~6개사들이 즉각 현대엘리베이터 자사주 43만주(7.66%)를 장외매입했다.
이처럼 든든한 ‘우군’ 역할을 했던 KCC가 현대엘레베이터의 강력한 위협 세력이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외국인 공세로부터 급한 불을 끈 뒤 정상영 전 명예회장은 ‘정씨가 현대그룹을 맡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정몽헌 회장의 아내인 현정은 회장에 맞서기 시작했다. 정주영 회장의 현대를 계승한 회사를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다는 뜻이었다. 백기사 역할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던 KCC는 현대엘리베이터 뿐 아니라 현대상선 지분까지 사들이며 현대그룹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정상영 전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막내동생으로 정몽헌 회장 생전에 개인적 채무를 갚아주는 등 조카와 각별한 사이였다. 정주영 명예회장 타계 후 집안의 큰 어른으로 현대그룹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평소 말투와 행동, 외모 등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비슷해 생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대가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도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범 현대가 전체 지분이 35%를 넘고 엘리베이터의 2대 주주(KCC 지분 포함)였던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엘리베이터와 현대그룹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2003년 10월 현정은 회장이 공식적으로 그룹 회장으로 등극하자 정상영 회장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모펀드와 뮤추얼펀드를 이용해 비밀리에 3개월 간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수했고 같은 해 11월 지분 44.4%를 확보했다며 현대그룹 인수를 공식선언했다.
이렇게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이 KCC에 넘어가는 듯 했으나 뜻밖의 작은 구멍에서 허점이 나왔다. 지분 5% 이상을 취득하면 공시를 해야 하는 의무, ‘주식대량보유변동보고’를 이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KCC가 5%룰을 위반했다며 사모펀드와 뮤추얼펀드를 통해 매입한 지분 20.78%를 전량 처분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지난한 경영권 다툼에서 현정은 회장이 결국 승기를 잡게 됐다.
당시 정상영 명예회장을 향해 '상중에 조카 그룹을 빼앗으려 한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후 일각에서는 정씨 일가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KCC 위협 방어해준 쉰들러와의 '잘못된 만남', 20년간 악연
KCC와의 분쟁 이후 잠시 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현대엘리베이터는 또 다른 기업으로터 적대적 M&A에 노출되고 만다. 현대엘리베이터와 20년 지난한 경영권 분쟁을 이어온 쉰들러. 쉰들러는 사실 처음엔 KCC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을 지키는 백기사로 활동했던 곳이다.
쉰들러는 스위스 엘리베이터 회사로 전세계 엘리베이터 시장 2위, 에스컬레이터 시장 1위 업체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회사지만 유독 한국시장에서는 실패했다. 1957년 위덕무역(현 세방엘리베이터)과 합작으로 첫 진출을, 1987년에는 '한국 쉰들러'로 2차 진출했지만 부도처리되면서 1993년 철수했다.
한국은 엘리베이터업계서 세계 3위 규모의 시장이다.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돼 있어 고층빌딩이 많고 주거형태로 아파트를 선호해 아파트 신축 및 재개발·재건축도 활발하다. 쉰들러는 이런 한국시장을 포기하지 않았다. 2003년엔 중앙엘리베이터를 인수하면서 한국 시장에 재도전했고 한국 최대 엘리베이터 회사 현대엘리베이터에 접근했다.
쉰들러는 중앙엘리베이터 인수 후 KCC와의 경영권 분쟁으로 흔들리는 현대엘리베이터에 제안을 한다. KCC와의 다툼에서 우군 역할을 하는 대신, 현대엘리베이터의 승강기 사업을 넘겨달라는 얘기였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승강기 사업을 분할해 신규법인을 설립하고 이후 쉰들러가 이 신규법인의 지분 60%를 인수키로 했다. 당시 아예 경영권을 잃을 위기에 처한 현정은 회장은 이를 받아들이고 논의를 발전시켜갔다. 하지만 KCC와의 경영권 분쟁에서 현정은 회장이 승리하게 됐고 쉰들러와의 얘기는 무산됐다.
쉰들러는 2년 뒤인 2006년 KCC로부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5.5%를 매입해 2대 주주에 올랐다. 당시에도 쉰들러는 “우리의 지분 매입은 KCC의 위협에서 현정은 회장의 불안감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야욕을 숨겼다.
쉰들러와 현대엘리베이터와의 분쟁이 시작된 건 2010년 현대건설 인수 때부터다. 쉰들러는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나서자 승강기 사업을 넘기면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쉰들러는 2대주주로서의 제의도 했다. 현대건설 인수는 자금적으로 무리고 자금을 댈테니 차라리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해 구조적 약점을 해소하라고 건의했다. 이 역시 거절당했다.
파트너십이 아예 틀어진 쉰들러는 현정은 회장이 2006년 맺은 파생상품계약을 문제 삼으며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현정은 회장은 KCC와의 분쟁 이후 정몽준 전 현대중공업 회장과의 현대상선 경영권 분쟁에서 현대상선을 지키기 위해 현대상선 측 우호세력과 무리한 파생상품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쉰들러는 현정은 회장이 개인의 욕심으로 경영상 잘못을 저질러 주주에게 거액의 손실을 입혔다며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상소와 항소를 거쳐 2023년 3월 현정은 회장이 최종 패소하고 원금 1700억원, 지연이자까지 합하면 총 2700억원에 달하는 금액을 물어내야 했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네트워크가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등 자금 마련에 나서 배상금 전액을 완납했다. 당초 쉰들러는 배상금을 근거로 현정은 회장의 보유 지분에 대한 강제집행을 통해 현대엘리베이터의 경영권을 장악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현정은 회장은 작년 사모펀드 운용사 H&Q코리아를 또 새로운 백기사로 동원했다. 현정은 회장이 H&Q코리아가 투자한 3100억원으로 대출금을 상환하면서 쉰들러는 더 이상 손쓸 수 있는 방도가 없어졌다.
현재 쉰들러는 지분율을 9.94%까지 낮추며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계속해 매각 중이다. 지난해 지분을 소량씩 매각할 때만 해도 재계는 의도적인 흔들기로 봤으나 2대주주 자리를 넘겨줄 만큼 매각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정리 수순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