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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 의안에는 인사부터 재무, 투자, 사회공헌, 내부통제 등 기업 경영을 둘러싼 다양한 주제가 반영돼 있다. 안건 명칭에 담긴 키워드를 살피면 기업이 지향하는 가치와 경영진의 관심사, 사업 방향성이 드러난다. THE CFO는 텍스트마이닝(text mining) 기법을 활용해 주요 기업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 명칭 속 단어 빈도를 분석하고 핵심 키워드와 기업의 관계를 살펴본다.
SK하이닉스는 국내 시가총액 2위이자 글로벌 반도체 생산 강자로 자리매김한 기업이다. 그동안 이사회에서 처리된 안건을 살펴보면 최대 화두는 '계열사 거래'였다. 2021년부터 2024년까지 상정한 의안 192건 중 53건이 거래와 맞닿아 있었다.
거래가 단연 활발했던 계열사가 SK에코플랜트로 3년여 동안 11회 언급됐다. SK하이닉스가 팹(반도체 생산시설)을 조성하는 공사를 SK에코플랜트에 맡기는 등 긴밀한 협조 관계를 구축한 배경이 작용했다. D램 제조 거점 역할을 수행한 중국 우시법인 'SKHYCL' 역시 7회 거론됐다. 주로 잉여 장비 매각 등 자산 재배치를 둘러싼 의사결정에 초점을 맞췄다.
◇'사외이사회' 사전심의, 3년간 거래상대 19곳 SK하이닉스 이사회가 2021년부터 올 6월 말까지 보고받거나 심의한 의안은 192건이다. 안건을 살펴보면 '거래'라는 키워드가 최다 수준으로 거론됐다. 전체 53회로 집계됐는데 언급 빈도 2위 단어 'SK'(36회)와 견줘봐도 1.5배 가까이 많은 수치다. 그밖에 상위 10위 안에 든 단어 면면을 살피면 △기부금(16회) △출연(15회) △이사회(14회) △계획(13회) △SK에코플랜트(11회) △평가·처분·자기주식(각 10회)이 존재한다.
이사회 규정 제11조를 살피면 주요주주와 회사간의 거래, 최대주주·특수관계인과 거래, 공정거래법상 자본금과 자본총계 가운데 큰 금액의 5% 이상이거나 100억원을 웃도는 거래 행위는 모두 이사회에서 검토해 승인하는 사항에 속한다. SK하이닉스는 이러한 자금 집행 안건의 중대성을 감안해 사외이사로만 구성된 회의 기구 '사외이사회'에서 사전 심의하는 체계도 구축했다.
거래를 명시한 의안 53건은 대부분 SK그룹 산하 회사들과 연관돼 있다. 계열사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수펙스추구협의회와 지주사 SK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SK에코플랜트, SK쉴더스 등 17개사가 3년 6개월간 SK하이닉스의 거래 상대로 포진했다.
SK에코플랜트와의 거래를 둘러싼 심의가 단연 활발했다. 총 11건으로 거래 의안 53건 가운데 20.8% 비중을 차지했다. △2021년 3건 △2022년 4건 △2023년 1건으로 나타났는데 올 들어서는 상반기에만 3건을 처리했다. SK에코플랜트는 산업시설·주택·인프라 건설을 비롯해 폐기물 재활용, 연료전지, 수소,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을 수행하는 회사로 올 상반기 말 기준 최대주주는 지주사 SK(지분율 42.9%)다.
SK하이닉스가 SK에코플랜트와 끈끈한 거래관계를 형성한 건 팹(반도체 제조시설)을 조성하는 공사와 맞닿아 있다. 그동안 경기 이천 M16, 충북 청주 M15 등 SK하이닉스의 공장 건설은 SK에코플랜트가 오롯이 수주했다. 반도체 공정 핵심기술 유출을 방지하는 취지에서 그룹 계열사가 건립을 도맡는 체계를 구현했다. SK하이닉스가 122조원을 투입하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프로젝트에서도 SK에코플랜트는 시공사로 참여 중이다.
◇우시법인 '자산 재배치' 초점, EUV장비 공급 'ASML'도 포함 중국 우시에 자리잡은 생산법인 'SKHYCL'은 SK에코플랜트의 뒤를 이어 많이 언급된 회사다. 거래 안건 53건으로 한정하면 5건(9.4%), 3년 6개월 동안 처리된 전체 의안 192건 가운데서는 7건(3.6%)으로 집계됐다. 올 1월과 6월에 의결한 안건은 잉여 장비의 매입과 매각을 병행하면서 효율적으로 자산을 배치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SKHYCL은 2005년에 설립된 이래 SK하이닉스 전체 D램 생산량의 50%를 책임지는 중추로 자리매김했다. 지난해 매출이 5조1401억원으로 2018년 2조5188억원과 견줘보면 5년새 2배 넘게 불어났다. 현재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이 SKHYCL 대표 직책도 함께 맡고 있다.
중화권에는 D램 제조법인 SKHYCL 외에도 상하이, 충칭 등 주요 권역에 반도체 제조·판매 계열사들이 포진했다. 이들 업체 가운데 8인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에 특화된 자회사 SK하이닉스시스템IC 우시법인은 올 들어 주주 구성에 변화를 맞았다. 현지 지방정부 산하 투자회사 우시산업발전집단이 우시법인 지분 21.3%를 2054억원에 사들였다.
여세를 몰아 우시산업발전집단은 SK하이닉스시스템IC 우시법인이 실시한 2억달러(2720억원) 규모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주식 28.6%를 추가로 확보하는 수순으로 이어지면서 우시법인의 지분 구성은 SK하이닉스시스템IC 50.1%, 우시산업발전집단 49.9%로 재편됐다. 중국 지방정부와 공고한 협력관계를 구축해 현지 파운드리 사업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취지가 반영됐다.
SK하이닉스 이사회 의안에 기재된 거래 상대 면면을 살피면 SK그룹 계열사가 아닌 기업이 단 한 곳 존재한다. ASML로 첨단 칩 제조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양산하는데 잔뼈가 굵은 네덜란드 기업이다. SK하이닉스는 2021년에 ASML과 4조7000억원 수준의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파트너십을 형성했다. 5년 동안 ASML로부터 EUV 장비를 장기간 도입하는 내용에 방점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