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부터 기업들의 자사주는 다양한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소각을 통해 주주가치를 높이기도 하고 임직원 보상에 쓰이기도 한다. 기업 M&A 대가로 지급할 수도 있다. 다만 자사주 활용이 기업가치에 부정적 영향을 주기도 한다.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 수단이 되거나 경영권 분쟁 시 우호지분 확보용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았다. THE CFO는 기업이 보유 중인 자사주가 어떤 형태로 동원될 수 있는지 활용 사례를 유형별로 나눠 짚어본다.
SK하이닉스가 자기주식과 연계해 발행한 교환사채(EB)는 역대급 규모로 불린다. 현금 여력이 있을 때 매입해 둔 대량의 자기주식이 지난해 반도체 '보릿고개'를 넘던 SK하이닉스에 거액의 유동성을 불어넣어줬다.
분위기는 올 들어 반전됐다. SK하이닉스는 업황 회복에 힘입어 빠르게 실적개선을 이뤄냈다. 주가도 이를 반영했고 작년 4월 EB를 찍었을 당시 대비 2배 넘게 올랐다. 해당 추세가 지속된다면 EB 투자자들이 얻을 차익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추후 대량의 자사주가 시장에 풀리면 주식가치 희석은 불가피하다. 이는 회사가 소각 대신 자사주를 기반으로 한 자금조달을 선택한 데 따른 대가다.
◇현금여력 보유시기 2015·2018년, 두 차례 '같은 주식수' 매입
SK하이닉스가 SK그룹 편입 이후 처음 자사주를 매입한 시점은 2015년 7월이다. 총 8600억원을 투입해 2200만주를 매입했다. 주당 취득가액은 3만9050원이었다.
SK하이닉스의 자사주 취득 이력은 설립 이래로 넓혀봐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1997년 현대전자 시절 주주친화정책의 일환으로 270만주가량의 자사주를 산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SK하이닉스는 이후 대부분을 장내 처분했고 2006년부터는 자사주를 1주도 보유하지 않고 있었다.
18년만의 자사주 취득이란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은 주가 방어을 위한 일이었다. 특히 당시 중국 국영반도체 기업이 세계 3위권인 미국 마이크론에 대한 인수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가 많이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주주가치 제고에 신경을 쓸 여력이 생긴 시점이기도 했다. SK하이닉스가 2001년 채권단에 매각된 후엔 주가 안정이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협받았다. 자사주 매입은 꿈도 못꿨다. 2012년 SK그룹에 편입되고 실적개선이 이어지지고 나서야 자사주 매입에 나설 만큼 유동성이 개선됐다.
두번째 매입은 2018년 7월에 발표됐다. 첫번째 매입 때처럼 2200만주를 매입했으나 3년 사이 주가가 상승해 같은 양의 주식을 사들이는 데 2배 넘는 돈(1조8282억원)이 들었다. 한 주당 가격은 8만3100원이었다.
2017~2018년은 반도체 초호황기로 SK하이닉스 창립 후 가장 많은 매출과 이익을 냈을 때였다. 2017년 30조원이었던 매출은 2018년 40조원대까지 확대됐고 영업이익 역시 14조원에서 21조원까지 높아졌다. 당시 현금성자산은 8조원대로 실탄도 두둑했던 만큼 대량의 자사주 매입이 가능했다. 2018년을 끝으로 SK하이닉스의 자사주 매입은 더 이상 없었다.
이렇게 SK하이닉스는 총 4400만주 규모의 자사주를 보유하게 됐다. 거액의 자사주를 놓고 시장에선 공정거래위원회의 상장 자회사, 손자회사의 의무 지분율 상향 규제에 대비한 조치란 시선도 있었다. SK텔레콤이 SK하이닉스 지분율을 20.07%에서 30%까지 올리려면 장중에서 6조원이 넘는 SK하이닉스 주식을 사들여야 하는데, SK하이닉스가 자사주를 대거 소각해 SK텔레콤의 SK하이닉스 지분율을 자체적으로 최대한 높이려 한다는 관측이었다.
결론적으로 소각을 하지 않았으니 해당 용도로 쓰이진 않았다. 2021년 11월 SK텔레콤을 인적분할해 SK스퀘어를 중간지주사로 신설, SK하이닉스를 그 밑으로 옮김으로써 규제위험을 피했다.
SK하이닉스는 호황기를 지나 2019년 경영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주주환원정책을 보수적으로 가져가게 됐다. 이에 따라 자사주 역시 그냥 보유했다. 중간에 임직원이나 이사에게 성과급 지급용으로 자사주를 처분한 적은 있지만 전체 보유 물량 중 큰 비중은 아니었다. 이렇게 5~8년 동안 묶여있던 자사주는 지난해 상당부분 자금조달용으로 쓰이게 됐다.
◇역대 최대 규모 자기주식 담보 EB 발행, 투자자 현시점 '함박웃음'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월 17억달러(2조2377억원) 규모의 해외 EB를 발행했다. 당시 국내 기업이 자사주를 활용해 발행한 EB 중 최대 규모였다. 2021년 8월 포스코가 11억유로(1조6000억원) 규모의 그린본드 EB를 발행한 게 가장 컸는데 SK하이닉스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EB는 사채권자 의사에 따라 기초자산으로 설정된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채권이다. SK하이닉스 입장에서 돈을 빌리고 나중에 SK하이닉스 자사주로 갚는 구조다. 기초자산은 SK하이닉스 주식 2012만6911주로 설정됐다. 자사주 보유량의 절반이 넘는 수량이다.
SK하이닉스의 EB 발행은 풍부한 자사주를 기반으로 거액의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묘수를 발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자사주 평균 취득가액은 주당 6만1075원. 자사주 1주 당 11만1000원의 자금을 조달했으니 남는 장사기도 했다.
SK하이닉스는 작년만 해도 반도체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메모리 불황으로 2022년 4분기 영업손실이 1조7012억원을 기록했다. 2012년 3분기 이후 10년 만에 분기 적자 전환이었다. EB 발행 시점인 작년 1분기 SK하이닉스의 영업적자는 3조4000억원으로 손실폭은 더욱 커졌다. 2023년 한 해 동안에만 9조원에 육박하는 투자금이 필요했던 SK하이닉스에 단기 자금조달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EB를 통한 조달은 반도체 업황이 회복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SK하이닉스는 해당 자금을 모두 당해연도에 사용하면서 필요한 투자를 집행했다. 단기 유동성 문제를 해결했다는 단편적 의미가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공격적 투자 그 자체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업황 개선에 대한 확신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됐다.
올 들어 SK하이닉스는 역대급 실적을 냈다. 올 상반기 영업이익은 5조4685억원으로 손실이 났던 일부 사업 및 지역의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D램과 낸드플래시 모두 가격이 상승했고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포함한 메모리 제품의 판매 확대 등도 역할을 했다. D램이 낸드보다 큰 상승 폭을 보인 것은 HBM, DDR5 등의 차세대 제품 출하 확대와 수요 증가로 회복세가 상대적으로 빨랐기 때문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HBM에 대한 투자가 결실로 돌아온 것으로 시장은 평가했다.
EB 투자자들도 현재 상황에선 긍정적이다. EB 만기는 2030년 4월, 풋옵션 행사가 가능한 시점은 2027년 4월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 섣불리 웃을 순 없지만 SK하이닉스 주가는 이미 교환가액을 훌쩍 넘어섰다. EB 교환가액은 11만1180원이다. 주가가 상대적으로 낮았던 4월 11일 종가 8만7200원의 127.5%으로 책정됐다. SK하이닉스 주가는 이달 27일 종가 기준 17만5000원으로 작년 4월 대비 2배 넘게 올랐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EB 투자자들은 몇 배의 투자차익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2027~2030년 EB 풋옵션 행사기간 혹은 만기에 SK하이닉스 주식 공급이 늘어나는 점은 주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교환 청구로 대량의 자사주가 시장에 풀리면 잠재적으로 주당가치가 2.4% 희석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는 회사가 자사주 소각 대신 자사주를 지렛대로 한 자금조달을 선택한 데 따른 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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