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의 마법'은 오너로 불리는 지배주주가 지분율을 늘리는 '고전'이다. 인적분할을 통해 자사주가 신설회사의 주식으로 전환되면서 묶여있던 자사주 의결권이 살아나는데 이를 지배력 강화의 지렛대로 삼는 방식이다. 범 현대가 기업에서 자주 목격되는 방법으로 대표적 케이스가 HD현대 지주사 전환 과정이다.
현대중공업은 13.4%에 달하는 자사주를 최대한 활용해 지배구조를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오너의 지배력을 크게 강화할 수 있었다. 현재 HD현대그룹 안에서는 정기선 부회장의 지분 확대가 주요 과제인 가운데 자체 매입과 더불어 자사주 소각을 통한 지분율 상승이 현실적 대안으로 꼽힌다.
◇지주사 전환의 서막…생존·순환출자 해소 필요성 대두
현대중공업은 조선업 경기가 정점을 찍었던 1990년대 사업다각화로 사세를 확장했다. 해양플랜트, 엔진·기계, 로봇, 전기전자시스템, 에너지, 건설장비 사업 등 인수합병(M&A)과 투자 확대를 통해 다양한 사업 영역에 진출했다. 2002년 2월 현대그룹과의 계열 분리 후 현대중공업그룹으로 홀로선 뒤에도 세계 1위 조선업체라는 타이틀을 이어갔다.
그러나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양플랜트 저가수주 상황이 장기화됐고 2014~2015년 2년 간 5조원의 영업손실을 내기에 이르렀다. 수주 규모는 호황기 대비 10분의 1 토막으로 쪼그라들었다.
체질개선이 절실해진 현대중공업은 비핵심자산 매각·군산조선소 폐쇄와 희망퇴직, 지주사 전환을 추진하기로 했다. 현대중공업은 회사 내 중복 사업으로 인한 비효율을 없애고 사업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지주사 전환은 사업적인 측면이 아니더라도 지배구조 측면에서 언젠간 꼭 이뤄야 할 과제였다. 당시 현대중공업 지배구조는 순환출자 형태였다. 최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현대중공업 지분 10.2%로 그룹사 전체를 지배했다.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중공업'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통해서였다. 당시 자본시장의 투명성 강화를 강조한 정부는 현대중공업에 순환출자 해소를 지속적으로 요구했고 2017년 4월 지주사 전환을 통해 지배구조를 손봤다.
◇자사주 13.4% 십분 활용...인적분할 후 오너 지배력 강화, '마법같은 일'
현대중공업은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당시 13.4%인 자사주를 최대한 활용했다. 오래 전부터 1조5000억원을 들여 자사주를 차곡차곡 사들였다. 회사가 어려웠을 때 일부를 처분, 유동성을 확보했고 9670억원 규모의 자사주는 남겨놓았다. 해당 자사주가 인적분할에 십분 활용됐다.
현대중공업그룹은 2017년 4월 현대중공업을 인적분할해 지주사인 현대로보틱스(현대중공업지주·현 HD현대)와 현대중공업, 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 등 4개 회사로 나눴다.
이 과정 중 현대중공업 자사주가 현대로보틱스로 넘어가면서 의결권이 되살아났다. 현대로보틱스는 자사주 비율만큼 신설 자회사 3곳의 신주도 각각 배정받게 됐다. 현대중공업 자사주 13.4%가 분할 이후 현대중공업·현대건설기계·현대일렉트릭 지분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현대로보틱스가 새롭게 확보한 자회사들의 신주들도 의결권이 인정됐다. 이른바 '자사주 마법'이다.
현대로보틱스는 3개 자회사 주주들로부터 해당 회사들의 주식을 현물출자받는 대신 현대로보틱스 신주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유상증자를 실시했다. 그 결과 현대중공업지주의 현대중공업 지분은 27.8%, 현대일렉트릭 지분은 27.6%, 현대건설기계 지분은 24.1%로 각각 증가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현대로보틱스, 즉 현대중공업지주의 대주주 정 이사장 역시 추가적 지분 매입 없이 각 회사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분할 전 정 이사장의 현대중공업 지분율은 10.15% 수준이었다. 인적분할로 정 이사장은 현대로보틱스와 현대중공업, 현대건설기계, 현대일렉트릭 지분을 각각 10.15%씩 보유하게 됐다. 이후 정 이사장은 현대로보틱스가 나머지 3개사에 대해 실시한 현물출자 방식의 유증에 참여해 현대로보틱스 지분율을 25.8%까지 높였다.
해당 방식은 이후에도 꾸준히 오너들의 지배력 강화 목적으로 활용돼 왔다. 자사주 마법이 코리안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의 원인 중 하나라는 지적도 계속됐다. 이에 금융위원회는 올 6월 상장사가 인적분할·합병 등 조직재편시 자사주에 대한 신주 배정을 금지하는 입법예고안을 내놓았다. 이는 법제처 심사, 차관·국무회의를 거쳐 3분기 중 시행될 예정이다.
◇정기선 부회장 지분 승계, 남은 과제...자사주 '역할'할까
현재 HD현대그룹 지배구조상 가장 큰 과제는 정기선 부회장의 지분 승계 작업이다. 정 부회장이 HD현대그룹을 지배하려면 최상위 지배회사인 HD현대 지분 확보가 필수적이다. 부친인 정 이사장의 지분을 증여·상속 받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지만 세금 문제 등으로 그동안 정 부회장 나름 HD현대 지분을 꾸준히 사모아야 한다. 현재 정 부회장의 HD현대 지분율은 6.12%가량이다. 배당 등 각종 소득으로 지분 매입재원을 충당하기엔 속도에 한계가 있다.
정 부회장의 지분율을 높이는 방법은 정공법으로 지분을 사들이는 것 외에 회사가 자사주 소각을 진행하는 것도 있다. HD현대는 2020년 2월 6일 창사 이래 첫 자사주 소각을 실시했다. 보통주 48만8000주를 취득한 후 바로 소각했는데 이는 발행주식총수의 3%, 1300억원 수준이었다. 발행주식수가 줄어드니 모든 주주들의 지분율이 올라갔고 당시 정 부회장의 지분율 역시 5.1%에서 5.26%로 높아졌다.
이를 바탕으로 HD현대의 잔여 자사주도 소각될 것이란 관측이 흘러나온다. 추가 매입 가능성도 열려있다. 자사주 소각은 주주가치 제고 측면에서도 환영 받는 의사결정인 만큼 부담도 없다. 현재 HD현대는 자사주 832만주가량을 보유 중이다. 발행주식수의 10%가 넘는 규모로 현재 시가로 총 6700억원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