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기업 이사회는 회사의 업무집행에 관한 사항을 결정하는 기구로서 이사 선임, 인수합병, 대규모 투자 등 주요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곳이다. 경영권 분쟁, 합병·분할, 자금난 등 세간의 화두가 된 기업의 상황도 결국 이사회 결정에서 비롯된다. 그 결정에는 당연히 이사회 구성원들의 책임이 있다. 기업 이사회 구조와 변화, 의결 과정을 되짚어보며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요인과 핵심 인물을 찾아보려 한다.
고려아연 이사회에는 현대자동차 임원이 멤버로 자리하고 있다. 유상증자를 통해 지분관계를 형성하면서 들어온 기타비상무이사로 MBK-영풍과 벌어지는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 역할로 주목받는 자리다.
통상 지분을 섞으면서 들어온 주주는 현 경영진의 우군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현대차는 과거 KT 사태 때 경영진과 거리를 둔 적이 있다. 물론 고려아연과 KT는 오너 기업과 오너가 없는 소유분산 기업이란 점, 정치적 압박의 경중이 다르다는 점 때문에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다.
◇현대차, 지분 섞은 혈맹과도 거리 둔 사례 있어 현재 고려아연 이사회 구성원 13명 중 3명은 기타비상무이사다. 이 직함은 사내이사 및 사외이사가 아니면서 이사회에 자리를 가진 인사를 뜻한다. 통상 대주주이거나 지분관계가 있는 법인의 임원이 자리를 맡는 경우가 많다. 고려아연의 경우 주주사인 영풍과 켐텍, 현대차 임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9월 현대차그룹의 미국 투자법인 'HMG글로벌'을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끌어들였다. 5270억원 규모를 투입한 HMG글로벌은 고려아연 지분 5%를 확보했다. 그 대가로 현대차는 이사선임권 1석을 얻고 김우주 현대자동차 기획조정실 기획조정1실 본부장을 기타비상무이사로 앉혔다. 여기에 영풍 측이 반발, 소송을 제기하면서 경영권 분쟁이 불거졌다.
세간에서 현대차는 고려아연 현 경영진인 최윤범 회장 측 우군으로 분류된다. 유증 거래를 주도한 게 최 회장 측이며 영풍이 여기에 반대해 소장을 제기한 만큼 현대차가 영풍 편을 들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측에 있는 MBK파트너스 등은 현대차 등을 우호세력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현대차는 고려아연이란 회사와 비즈니스 파트너십을 맺은 것이지 특정 개인 및 개인의 경영권에 같이 행동하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에서도 현대차를 최 회장 측의 절대적 우호세력으로 볼 수 있는 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남아있다. 이 같은 시각의 근간에는 과거 현대차가 KT와 지분을 섞은 혈맹을 맺으면서도 경영진 편을 들지 않았던 사례가 있다.
◇정부 압력 있던 KT와 달리 고려아연은 주주 간 분쟁 현대차는 현대모비스와 함께 2022년 9월 KT로부터 7459억원 규모의 자기주식(지분 7.7%)을 넘겨받는 지분교환 거래를 통해 2대 주주가 됐다. 모빌리티와 IT·통신, 자율주행, 전기차 충전사업 등 전 방위적인 사업협력을 위해서다. 이처럼 지분을 섞는 거래로 들어온 주주는 사업협력과 더불어 경영진의 우호세력으로 지배력 제고에 일조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자사주를 오너의 지배력 일환으로 보는 이유다.
하지만 지난해 3월 현대차는 KT 이사회에 대표이사(CEO), 사외이사 선출 등 주요 안건에 대주주의 뜻이 반영돼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당시 KT는 구현모 대표가 연임에 성공했으나 정부의 압박으로 하차하고 그의 후계자이며 KT와 현대차를 두루 거친 윤경림 내정자가 CEO 직을 이어받는 과정이었다.
정부가 윤 내정자에게도 비토(거부)를 행사하는 와중에 2대 주주였던 현대차가 우회적으로 당시 경영진과 거리를 둔 셈이다. 그간 현대차그룹은 KT의 우호지분으로 평가받았으나 이 같은 입장을 밝히면서 우군이란 상식이 깨졌다. 현대차의 행보는 대통령실과 여당 의원들이 직접 압박하는 KT의 CEO 인선 논란에 휘말리지 않기 위한 조치로 풀이됐다.
현대차로선 KT가 오너 없는 소유분산 기업인 만큼 경영진과 회사를 분리시켜 접근하는 게 유리했다. 이후 1대 주주였던 국민연금이 KT 지분을 8.08%에서 7.51%로 낮춤에 따라 현대차그룹(7.89%)가 1대 주주로 올라갔다. KT의 경영진이 누구라도 현대차와는 사업협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다만 고려아연의 경우 KT와는 상황이 다르다. 고려아연은 최윤범 회장이 실질적인 대주주로 오너십을 유지하고 있다. 최 회장 일가 지분율은 21%로 영풍 일가(33%)보다 낮지만 한화, 현대차, 자사주 등 우군과 이사회를 통해 고려아연을 실효 지배하고 있다.
정치권 압력도 KT 때와 사뭇 다르다. 연고지인 울산에선 고려아연을 지원하는 여론전이 벌어지고 있다. 김두겸 울산시장과 울산 시의회 등이 고려아연 현 경영진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물론 대표이사 자리에 정치적 압력이 가해졌던 KT 때와 달리 고려아연은 정치권이 오너를 바꾸는 것까진 못하고 지역사회 이익에 대해서만 영향력 행사할 수 있는 정도로 차이가 있다.
재계 관계자는 "KT는 소유분산 기업인데다 정치적 압박이 있었지만 고려아연은 오너기업으로 현 사태의 본질이 두 주주(최윤범 회장 vs 장형진 고문) 간의 경영권 쟁탈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며 "현대차가 KT 때처럼 회사와 경영진을 분리 접근하기에는 재벌가 인맥이란 게 걸려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