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를 들여다보니 20년 전 방영된 드라마 '영웅시대'를 편집한 쇼츠(shorts) 영상이 즐비하다. 경제 발전을 선도한 현대와 삼성의 성장사를 그려낸 작품이다.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재계 1세대 오너들이 종잣돈을 마련하느라 분투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닮은 주인공은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차관을 받으려고 영국 기업인에게 "우리는 당신들보다 먼저 철갑선을 건조했다"고 설득했다. 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이 연상되는 인물 역시 공장 재건자금을 빌려줄 상대에게 국수를 끓여 대접하는 정성을 드러냈다.
대한민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이룩한 근간에는 차입의 기여가 두드러졌다. 1960~70년대 해외에서 도입한 차관은 사회간접자본과 산업시설을 조성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기업' 고려아연 역시 울산 온산제련소를 지으며 국제금융공사(IFC)와 산업은행 등 다양한 기관에서 4500만달러를 빌렸다.
최근 고려아연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격화된 와중에 차입이 도마에 올랐다. 지분 공개매수를 추진하는 MBK파트너스는 고려아연의 이자부 부채가 2019년 말 410억원이었으나 올 6월 말에는 1조4110억원으로 35배 늘어난 대목을 강조하고 있다. 과도하게 빚을 늘렸으니 현 경영진의 전문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가닿는다.
하지만 차입은 미래 성장동력을 육성하는데 필요한 수단이다. 최윤범 회장의 일성으로 추진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Troika Drive) 전략은 거액의 자금 집행이 불가피하다. 앞으로도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 2차전지, 자원순환 등 3대 부문에 10년간 11조9000억원을 투자해야 한다.
갚을 여력이 충분하면 외부에서 저렴하게 자금을 빌려오는 선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고려아연의 가용 유동성이 연결 기준으로 2조1000억원을 웃돈다. 이자부 부채를 온전히 상환해도 보유 현금은 7000억원이 넘는다. 신용평가사들이 책정한 장기신용등급 역시 'AA+'로 탁월한 수준이다.
물론 MBK파트너스의 주장이 재무건전성 훼손을 걱정하는 취지였다는 건 이해한다. 다만 기존 경영진과 차별화된, 창의적인 재무전략을 선보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경영 전문성이 뚜렷하다고 자인한다면 새로운 자금조달 대안도 얼마든지 제시할 수 있지 않을까.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신사업은 과거에도 숱한 의구심을 받았지만 시련을 이겨냈고 싹을 틔웠다. '차입'은 잘못이 없다. 차입이 미래를 위한 투자에 오롯이 쓰이는지, 효율적으로 자본을 배치하는 경영진의 역량을 들여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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