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은 그간 경영권이 옮겨지는 과정에서 이렇다할 잡음이 없었다. 삼성, 현대 등 굵직한 재벌가문에서 '형제의 난'이 한 번쯤은 일었던 것과 비교하면 우애가 좋은 편이다. 2세대가 물려받은 지분이 많지 않다 보니 서로 갈라졌다간 경영권을 온전히 지키기 어려웠던 배경도 있다.
경영권 이양은 DNA 변모와 맞물려서 이뤄졌다. 창업주 고(故)최종건 회장이 초석을 쌓았다. 직물회사 선경을 인수, 섬유사업을 키운 그는 1970년대 정부에서 중화학공업 집중 육성을 발표하자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한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별세하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석유사업 진출을 완성시킨 것은 동생 고 최종현 회장이다. 수년 뒤 한국이동통신까지 인수하면서 그룹의 정체성이 섬유에서 석유, 통신으로 완전히 이동했다.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2세 최태원 회장 하에서는 다시 반도체 시대가 열렸다. 2011년 인수한 SK하이닉스가 그룹 최고의 캐시카우로 성장했다.
3세대로 대물림이 일어나기까지 SK그룹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뭘까. 새로운 정체성에 발맞춰 지배구조를 정리하는 일이다. 지난해 말 기준 SK하이닉스의 자산총계는 연결 기준으로 약 104조원, 별도로 봐도 92조원에 이른다.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SK네트웍스의 자산을 모두 합쳐도 SK하이닉스의 자산이 더 많다. 이제 SK그룹의 근간은 반도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손자회사' 덫에 걸린 SK하이닉스 문제는 SK하이닉스가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인 SK㈜의 손자회사라는 점이다. ㈜SK → SK스퀘어 → 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지분구조를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 지주회사의 손자회사는 증손회사를 둘 수 없고, 증손회사를 거느리려면 지분을 100% 소유해야 한다. 국내에 한해선 SK하이닉스가 모든 투자를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M&A를 통한 사업 확장이 어려우니 그룹 입장에서 큰 제약이다.
자연히 추후 지배구조 개편의 핵심목표는 SK하이닉스를 자회사 위치로 끌어올리는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선택지를 짚어보면 SK㈜가 SK하이닉스를 흡수합병하거나 SK스퀘어가 공정거래법상 중간지주회사로 올라서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SK하이닉스는 지주사의 자회사이므로 손자회사의 굴레를 벗어 던지게 된다.
2021년 SK스퀘어가 SK텔레콤에서 인적분할로 떨어져나와 중간지주회사'격'의 역할을 하게 된 것도 전초작업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통신사업으로 벌어들인 자본이 반도체 진출의 기반이 됐기 때문에 그 전까진 SK텔레콤이 SK하이닉스의 모회사였다.
SK하이닉스 외에 또 하나의 개편 키워드로는 친환경을 꼽을 수 있다. SK건설이 SK에코플랜트로 탈바꿈하고, SK온이 SK이노베이션에서 떨어져나와 2차전지사업에 공격적 투자를 하는 것은 반도체와 함께 친환경을 그룹의 중심축으로 뿌리내리려는 노력인 셈이다. 친환경으로 가치를 키워 추후 기업공개(IPO)를 통해 현금 유입을 극대화할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SK온이 빠르게 덩치를 키우고 있다.
◇분쟁없는 경영권 이양, 3세대서 이어질까 현재 SK온을 이끄는 이는 최태원 회장의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이다. 잠시 회사를 떠났던 최재원 회장은 복귀 전부터 SK그룹의 전기차배터리 사업을 총괄했었다. 최태원 회장에게 정유사업을 대체할 유망사업으로 전기차배터리를 권유하며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한 것도 최재원 부회장으로 전해진다.
이밖에 고 최종건 회장의 2세 중에선 삼남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만 현재 경영 일선에 있다. 차남 최신원 전 네트웍스 회장은 2021년 경영에서 물러났으며 장남인 고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지병으로 2000년 작고했다. 창업주의 첫째인 만큼 최종현 회장이 타계할 당시 경영권을 이어받을 인물로 거명되기도 했다. 하지만 최 전 회장은 사촌동생이자 최종현 회장의 장남인 최태원 회장을 추천했고, 1998년 8월 SK㈜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SK그룹은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기 전이었다. SK상사(현재 SK네트웍스)를 정점으로 SK㈜와 SK텔레콤을 포함한 주력 계열사가 포진했던 형태다. SK상사에 대한 최태원 회장 지분은 0.01%에 불과했으나 최재원 수석부회장 등 형제들이 상속포기 각서를 쓴 덕분에 최종현 회장의 지분 2.85%를 전부 상속받으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이후 최태원 회장은 그룹의 지주사격 회사를 SK㈜로 전환하는 작업을 했다. 2003년 '소버린 사태'로 경영권을 위협받은 이후론 SK㈜ 지분을 계속 사들여 지배력 강화에 매진, 2007년 지주사 체제를 완성한다. 2018년 최태원 회장이 지분율 하락을 감수하고 친족들에게 지주사 지분을 증여하면서 그동안의 지지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으려는 것이라 밝힌 배경이다.
당시 SK㈜ 지분 23.12%를 보유하고 있던 최태원 회장은 329만주(4.68%), 총 1조원어치 주식을 친족 23명에게 나눠줬다. 동생인 최재원 회장이 절반(166만주, 2.36%)을, 나머지는 사촌 형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과 그 가족이 83만주(1.18%)로 대부분을 받았다.
분쟁을 저어하는 가문 분위기를 감안하면 3세 승계 역시 큰 갈등없이 흘러갈 것으로 보인다. SK디스커버리, SK네트웍스 등의 계열분리 가능성도 점쳐진다. 다만 아직 후계구도 윤곽이 잡히기엔 시기가 이르다.
최태원 회장의 장남인 인근 씨는 2020년 SK E&S에 사원으로 입사한 후 지난해 말 북미법인 패스키로 이동해 에너지솔루션 개발업무를 맡았다. 또 장녀 윤정 씨가 SK바이오팜과 SK㈜의 신약개발 태스크포스에 참여하고 있으며 차녀 민정 씨는 2019년 SK하이닉스에 입사했으나 휴직 중이다.
3세 중 가장 먼저 홀로서기에 나선 인물은 최신원 회장의 장남 최성환 SK네트웍스 사업총괄이다. 작년 말 사내이사로 선임, 경영 전면에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