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두산에너빌리티의 '뇌관'이 터진 해다. 무거웠던 부채 부담, 계속되는 자회사 지원, 친환경으로 재편되고 있었던 산업구조에 적응하지 못했던 결과는 냉혹했다. 여기에 정부의 탈(脫)원전 기조와 자금시장을 넘어 인력의 이동마저 정지시켰던 코로나19 사태가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게 2020년 초 두산그룹의 핵심 두산에너빌리티는 백기를 들었다.
2020년 3월 30일, 2020년 4월 29일, 2020년 6월 10일. 두산에너빌리티는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으로부터 각각 1조원, 8000억원, 1조2000억원의 긴급운영자금 차입약정을 체결했다. 총 3조원이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보유했던 두산메카텍 지분과 ㈜두산과 두산 오너들이 보유하고 있던 두산중공업 주식이 모두 담보로 잡혔다. 모든 계열사는 죄다 팔 수 있다는 조건 하에 그렇게 두산에너빌리티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 작업이 시작됐다.
◇밥캣 CFO 긴급 등판…채권단 조기졸업 공신
채권단으로부터 1조2000억원을 지원 받고 1달여 뒤인 7월 21일, 두산에너빌리티 최고경영자(CEO)인 박지원 회장은 두산밥캣의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박상현 사장(당시 부사장,
사진)을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박 사장은 비정기 임원인사를 통해 두산에너빌리티 CFO로 부임했다.
박 사장은 2004년 39세의 나이에 ㈜두산 전략기획본부 부장으로 경력 입사한 케이스다. 2008년 상무로 승진한 이후 두산인프라코어(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두산, 두산밥캣 CFO를 거쳤다.
박 사장은 두산에너빌리티 오너 경영인인 박지원 회장과의 인연이 깊다. 박 회장은 1965년생, 박상현 사장은 1966년 2월생으로 같은 시기에 연세대 경영학과를 입학해 학업을 수료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박지원 회장과 박상현 사장은 대학 동기로서 친분을 쌓아왔다. 오랫동안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박 회장은 박 사장을 구원투수로 발탁할 수 있었던 셈이다.
◇자산매각·유상증자…두산건설 뇌관 해체
박 사장은 CFO 부임 이후 두산에너빌리티의 빠른 정상화만을 생각했다. 곧바로 비핵심자산으로 분류됐던 골프장 클럽모우CC를 하나금융-모아미래도 컨소시엄에 1850억원에 매각했다. 매각으로 발생한 현금은 곧바로 채권단을 향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박 사장의 가장 큰 과제는 바로 두산인프라코어 매각이었다. 제 값을 잘 쳐줄 원매자를 찾아야 했다. 이 와중에 채권단의 눈치도 봐야 했다. 심지어 이 딜에는 두산인프라코어의 중국 자회사인 DICC에 걸려있던 사모펀드와의 소송 리스크도 해결해야 했다. 박 사장은 해답을 찾았다. DICC 분담금을 최소화하고, 현대중공업그룹이라는 건실한 SI와의 거래로 약 7000억원의 현금을 챙겼다.
마지막은 두산그룹을 고통스럽게 만든 원흉 중 하나로 꼽혔던 두산건설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부임 이후 두산건설을 대우산업개발에 매각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무산됐다.
2021년 말 박 사장은 두산건설에 대한 해법을 찾았다. 완벽히 두산건설을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두산건설로 추후 발생할 리스크가 모회사로 번지지 않도록 고리를 끊어놨다. 현재 두산건설의 최대주주는 사모펀드와 두산그룹 계열사 디비씨가 합작해 세운 투자목적회사(SPC)인 위브홀딩스가 출자해 세운 2차 SPC인 '더제니스홀딩스'다.
유상증자를 통한 자본확충 작업도 빼놓지 않았다. 작년 초 1조1500억원의 유상증자를 성공적으로 마치면서 두산에너빌리티는 2월 말 1년 11개월 만에 채권단 체제로부터 조기 졸업했다. 두산솔루스·두산인프라코어 등 두산그룹의 현재와 미래를 대표했던 계열사들이 품을 떠났지만, 궁극적인 목표였던 '생존 조건'을 빠르게 달성했다.
박 사장은 채권단 졸업 이후인 작년 3월 성과를 인정받아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작년 9월 중순 두산메카텍 매각 작업도 직접 주도하면서 미래를 위한 현금마련에 몰두했다. 오너의 신임을 두텁게 받았던 박 사장은 믿음에 보답했다. 박 사장의 대표이사 CFO로서의 임기는 내년 3월 말 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