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죄는 '타인을 향한 무사유'다. 그가 가진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우리 모두의 안에도 존재한다."
유대인 출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수백만명을 학살 수용소로 이송시킨 나치 공무원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이히만은 1961년 전범 재판에서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독일의 거대한 관료조직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에 불과했다"고 변명했지만 결국 죗값을 받았다.
이는 비단 60년 전에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쟁 학살 동참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 같은 일은 반복돼왔다. 자신의 결정이 가정과 기업,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고 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1년 미국 경제에 충격을 안겨준 엔론 사태의 중심엔 앤드류 패스토우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있다. 미국 에너지의 20%를 담당하던 대기업 엔론의 파산은 수많은 주식투자자들과 일반 미국 시민들을 고생시켰다. 이때도 재무팀 등을 통해 내부 정보를 먼저 입수해 주식을 팔아버린 관계자 일부를 제외하고 말이다.
시대, 지역적으로 멀리가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일들은 숱하게 발견된다. 대부분은 고의적으로 '악한' 의도 아래 재무적인 결정을 내린 경우다. 다만 자신의 결정이 무엇으로 파생될지 전혀 사유하지 않다가 그 결과물을 떠안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일례로 최근 알게된 모 상장사의 CFO는 그 자리에 앉기 전까진 재무나 법 관련 지식이 전무했고 해당 기업이 영위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다. 재무책임자로서 각종 중요한 재무결정안에 서명은 했지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나중엔 불법 자금횡령 사건에 휘말렸는데 본인은 조사 내내 "아무것도 몰랐고 그저 싸인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읍소했지만 결국 법적책임을 피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서울대 CFO아카데미, 한국CFO협회 등 관련 기관들은 CFO들을 대상으로 법적 책임 등 컴플라이언스를 충분히 지키도록 일정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수동적인 방어적 의미의 컴플라이언스 충족을 넘어 '휘슬블로어(내부고발자)' 등 능동적인 역할까지 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우종 서울대 CFO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재무상태를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CFO가 공익을 위해 내부고발을 하더라도 비밀과 생계가 보장되는 환경이 갖춰져야 할 것"이라며 "그래야 CFO들이 생계 고민 없이 자발적으로 휘슬블로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외국의 경우 PE들을 중심으로 대주주의 사익 편취 여부 등을 투명하게 보길 원하는 케이스가 늘고 있다. 장기적으로 투자업계의 '코리안 디스카운트'까지 줄이려면 기업 차원에서도 CFO의 '적극적인 사유'를 장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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