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의 지분 승계는 지배구조 개편과 따로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결국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의 지배력을 확보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종착역이 같다. 정 회장은 총수에 오른 지 2년이 다 돼가지만 핵심 계열사 지분율이 낮은 수준이다.
조 단위 자금이 필요한 두 가지 과제를 양손에 쥐고 있는 만큼 현대차그룹의 셈법도 복잡할 것으로 보인다. 정 회장은 계열사 지분을 다수 보유하고 있어 자금 여력을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둘 모두를 대비하기에는 넉넉하다고 보기 어렵다.
◇지분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에 8조~9조원 필요
정 회장은 2020년 10월 회장에 올랐지만 그룹 전반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갖추지 못한 상태다. 정 회장의 현대차 지분율은 2.62%에 그친다. 현대차의 최대주주(지분율 21.43%) 현대모비스 지분율도 0.32%밖에 되지 않는다.
현대차그룹은 순환출자구조 해소라는 해묵은 과제도 안고 있다. 지배력 강화와 함께 순환출자 고리를 끊으려면 정 회장이 기아, 현대제철, 현대글로비스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이면 된다. 회사 분할과 합병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되지만 직접 지분을 매입하는 방법이 정공법으로 통한다.
이 작업에 모두 6조원 정도가 들 것으로 추정된다. 기아, 현대제철, 현대글로비스가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이는 데 대략 5조원이 들고 해당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 다른 주식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양도소득세가 1조원 정도 들 것으로 예상된다.
지분을 물려받는 과정에서는 2조6000억원 정도의 세금을 내야 한다. 정 명예회장이 보유한 4조3000억원 규모의 계열사 지분에 최고세율 60%를 적용한 금액이다.
두 작업에 들어가는 돈을 단순 합산하면 8조~9조원에 이른다. 둘을 동시에 추진하기엔 자금 부담이 너무 큰 만큼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지분 승계와 지배구조 개편, 현대차그룹 우선순위는
2018년 3월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우선 순위는 명확했다. 현대차그룹은 국내 30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지 못한 곳이다.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직접 현대차그룹을 언급하는 등 새정부 출범 이후 외부의 압박이 컸다. 결국 현대차그룹은 대규모 출혈을 감내하고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 카드를 꺼내들었다.
4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와 분위기가 다르다. 친기업 성향의 정부라는 점에서 지배구조에 대한 압박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이다. 2018년 개편안이 무산되면서 오히려 시간을 번 셈이다. 이후 현대차그룹이 다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선 적은 없다. 그룹의 일거수일투족이 지배구조 관련 작업으로 해석되고는 있지만 현대차가 결정적 움직임을 보여준 적은 없다.
재계 관계자는 "데드라인도 없는 데다 지금은 적절한 시기도 아니다"라며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상황에서 현대차 역시 관심이 지배구조가 아닌 전동화 전환 등 미래에 있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앞서 4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배구조와 관련해 "사업적으로 많이 변화하고 있고 새로운 신사업이 들어가고 또 줄어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면서 진행하는 게 내부적으로 좋다고 판단을 한다"며 "그런 페이스에 맞추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계에선 정 회장이 우선 정몽구 명예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 7.17%를 물려받아 개인 최대주주에 오른 뒤 자금 마련 계획과 사업 방향성 등을 모두 고려해 차근차근 지배구조 개편을 준비할 것이란 관측이다.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 개편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또 있다. 정 회장이 지배구조 개편을 염두에 뒀다면 코로나19로 주가가 급락했던 시기 현대모비스 지분을 최대한 사들이는 편이 유리하다. 그러나 지분 매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정몽구 명예회장 역할은
정몽구 명예회장은 어떤 역할을 할까. 2018년 현대차그룹이 내놨던 지배구조 개편안에서는 정몽구 회장도 정 회장과 함께 현대모비스 지분 매입에 동참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당시만 해도 정 명예회장이 건재했다. 정의선 회장이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전이었던 만큼 정 명예회장의 참여는 당연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정 명예회장이 현대모비스 지분을 매입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보인다. 주식 상속세(증여세)의 최고세율이 60%로 다른 세금보다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이 굳이 지분을 매입한 뒤 해당 지분을 다시 정의선 회장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고액의 상속세(증여세) 부담을 지지는 않을 것이란 의미다. 부담해야 하는 세금을 줄이려면 정의선 회장이 직접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안이 훨씬 낫다.
정 명예회장은 증여 역시 염두에 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증여세의 경우 세율은 상속세와 같지만 시기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가가 하락했을 때 증여하면 부담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이 보유 중인 현대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주가가 한참 낮았을 때에도 증여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증여보다는 상속 쪽에 무게가 실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