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케미칼이 올 들어 카드대금채권 유동화를 통한 여유자금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카드대금 결제를 미루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C)이 유동화 증권을 발행해 롯데케미칼보다 먼저 카드값을 내고 있다. 이렇게 쌓인 카드 이용대금이 4000억원을 넘어섰다.
롯데케미칼은 화학업황 부진으로 2년 넘게 영업적자를 유지하고 있다. 현금 유출이 어느 때보다 아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AA급 이슈어(Issure)지만 '부정적' 등급 전망을 단 탓에 공모채 발행이 어려워져 최근 만기 1년짜리 기업어음(CP)으로 자금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SPC가 롯데케미칼보다 먼저 '대납' 5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신한카드와 맺은 카드대금채권 참가 계약에 따라 지난달 말 뉴스타그린켐제일차라는 SPC를 통해 각 600억원, 690억원 규모 ABCP(자산유동화기업어음)과 ABSTB(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를 발행했다.
이 같은 유동화를 택하면 카드사에 이득인 것처럼 보인다. SPC가 롯데케미칼이 쓴 신한카드 구매전용카드 매출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유동화증권을 발행해 이 돈이 카드사로 흘러 들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롯데케미칼은 유동화를 통해 결제일을 미루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유동화증권을 발행한 날 롯데케미칼은 카드 수수료만 지급하면 된다. 오는 10월 유동화 만기 시점에 1290억원을 결제하면 된다. 사실상 3개월 동안 1000억원 넘는 현금을 확보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눈에 띄는 건 올해 들어 카드대금채권 유동화가 처음으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뉴스타그린켐제일차는 지난 3월 ABSTB를 발행해 747억원을 유동화했다. 6월을 빼놓곤 매달 카드대금채권 유동화를 통해 단기 유동성 숨통을 트이고 있다.
유동화 내역이 쌓이다 보니 앞으로 신한카드에 결제해야 할 카드대금도 늘고 있다. 5월에 발행한 748억원, 907억원 규모 유동화증권 만기가 우선 이달 말 도래한다. 9월 말에는 지난달 발행된 1212억원의 ABSTB가 상환되어야 한다. 이번에 발행된 물량까지 포함하면 기발행 미상환 유동화증권이 4157억원에 달한다.
뉴스타그린켐제일차의 카드대금채권 유동화는 모두 KB증권 주관으로 이뤄졌다. KB증권은 롯데케미칼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1조2000억원 규모 유상증자는 물론 두 차례 공모채 발행에 모두 대표주관사로 동참했다. 이번에도 롯데케미칼 커버리지 담당 조직과 구조화금융 조직이 협업해 재무구조 개선에 기여했다.
◇공모채 조달 어려워지자 CP로 1000억 마련 KB증권이 올해 유동화를 통한 단기 조달 대안을 제공한 이유는 분명하다. 롯데케미칼이 공모채 발행을 통한 대규모 투심을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롯데그룹 핵심 계열사인 롯데케미칼은 크레딧 리스크 직격탄을 입었다. 2022년부터 글로벌 수요 부진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원가 부담이 맞물려 영업적자가 시작됐는데 올해 1분기까지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2023년 일진머티리얼즈(현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인수와 석유화학 설비투자로 대규모 지출이 시작돼 2021년까지 순현금 체제를 유지하다가 올해 1분기 말 6조5000억원 수준 순차입금을 기록하고 있다.
결국 지난해 상반기 말 국내 신용평가사 3사 모두 정기평가에서 신용등급을 ‘AA+, 부정적’에서 ‘AA0, 안정적’으로 한 노치(Notch) 내렸는데 올해 상반기 ‘AA0, 부정적’으로 재차 등급 전망이 하향 조정됐다.
이 탓에 작년 9월 2500억원 규모 공모채 발행을 끝으로 회사채 시장을 찾지 않고 있다. 올해도 발행을 시도했으나 결국 조달을 미루기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롯데케미칼은 4조원 넘는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전반적인 유동성 대응 능력에 대한 우려는 덜하지만 만기 구조가 단기화돼 카드대금채권 유동화로 결제일을 미루는 것으로 관측된다. 1분기 말 10조9400억원의 총차입금 중 5조5304억원이 단기 차입금이다.
유사한 전략으로 지난달 말에는 1000억원 규모로 만기가 1년에 육박하는 CP를 발행해 여유 자금을 마련했다. 롯데케미칼은 지난 2022년 발행한 2년 만기 공모채 1350억원의 만기가 이달 말 다가온다.
IB업계 관계자는 "당장 회사채 발행이 어렵다 보니 CP로 일부 조달해 자금을 마련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유동화 자체를 통한 현금 확보 효과는 크지 않지만 재무 부담을 덜기 위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