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 삼성SDI 경영지원실장(CFO·부사장)의 건배사는 '배터리'라고 한다. 일명 "배가 터지게 이익을 내자"란 뜻이다. 이 얘기를 듣자마자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연 확장보다 수익성을 중시하던 삼성 특유의 경영기조가 녹아있는 건배사이기 때문이다.
사실 2차전지가 마진이 좋은 사업은 아니다. 삼성SDI만 보더라도 배터리를 담당하는 에너지솔루션 부문의 영업이익률은 4.6%, 전자재료 부문은 9.6%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2차전지로 배가 터지게 벌려면 외연을 무리하게 늘리는 것보다 고마진 제품 위주의 경영이 필수다.
실제로 삼성SDI는 경쟁사들이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며 증설에 나설 때 외형 경쟁에 그리 적극 나서지 않았다. 삼성 전자계열사 중 유일하게 회사채 조달을 하긴 했지만 이 역시 모두 상환하는 등 레버리지를 줄였다. 시설투자는 영업현금흐름 내에서 집행했다.
경쟁사 대비 점유율 경쟁에서 뒤쳐질 것이란 우려가 팽배했으나 전기차 캐즘(침체기)에 들어선 지금에 와서 보면 삼성SDI는 오히려 현명하게 갔다. 이는 삼성SDI만의 기업문화 또는 김 부사장의 뚝심이었을까. 꼭 그렇게 한정적으로만 보긴 어렵다.
물산, 전자, 디스플레이, 전기, SDS, E&A 등 삼성그룹 상당수의 계열사들이 이 같은 재무 기조를 갖고 있다. 현금을 최대한 쌓아두고 외부차입을 최대한 지양하는, 자본시장을 통한 조달에 소극적이며 레버리지를 자제하는 전략. 삼성그룹을 관통하는 재무정책의 특징이다.
이런 재무성향이 삼성SDI에 안착된 계기로는 미래전략실 출신 CFO들이 꼽힌다. 2015년 말 삼성SDI 경영지원실을 맡은 김홍경 당시 전무(전략1팀 출신)를 비롯해 권영노 부사장(경영진단팀 출신)에 이어 현 김종성 부사장(전략1팀 출신) 모두 미전실에 몸담았던 인사들이다.
일설에 따르면 이 같은 기조가 확립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쯤 최도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사장이 IMF 시절을 회고하는 얘기를 강연장에서 한 적 있는데 당시 삼성전자의 실질적 자기자본이 제로였다는 고백이다. 그 이후로 삼성그룹은 전반적으로 현금을 넉넉하게 보유하고 자본시장 조달을 지양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것이다.
금융과 자본시장은 기업이 필요할 때 실탄을 대거 끌어올 수 있는 효과적인 무기다. 시장에 유동성이 풍부할 때, 경기가 좋을 때 다른 기업들이 레버리지를 늘려 질주하는 것을 보면 삼성의 걸음은 비교적 느리다 여겨질 수 있다. 다만 침체기에 들어서면 삼성이 순현금을 기저에 깔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움직이는지를 깨닫게 된다.
"수영장에 물이 빠지고 나면 누가 벌거벗은 채 수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워렌 버핏의 명언은 꼭 주식시장에서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CFO의 건배사에도 그 회사의 지향점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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