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그룹의 창업주 가문은 전통적으로 '자금 관리'에 잔뼈가 굵었다. 재무 임원 경험은 오너 일가가 '경영 수업'을 받는 데 필수 관문이었다.
허창수 명예회장은 1980년대 LG상사 관리본부에 몸담으며 전문성을 축적했다. 허 명예회장의 막냇동생인 허태수 회장은 2000년대 GS홈쇼핑 경영지원본부장을 역임했다. 허명수 전 GS건설 부회장도 사내 경영지원본부장으로 활약했다.
오너 4세 역시 재무 부서에서 경영 수업을 받았다. 허윤홍 GS건설 신사업부문 대표는 2011년 재무팀 부장으로 첫 발을 내디뎠다. 허서홍 ㈜GS 미래사업팀장은 2019년 GS에너지 경영지원본부장을 지냈다.
계열 분리 전까지 LG그룹에서 구씨 가문과 동업 관계를 형성했던 대목과 맞물렸다. 사업 확장 등 '바깥일'에 주력한 구씨 가문과 달리, 허씨 가문은 자금 운용, 회계 등 '안살림'을 챙기는 데 집중했다. GS그룹 오너 일가가 재무의 중요성을 체화한 배경이다.
◇'전략형 CFO 원조' 허태수 회장오너 일가 출신 재무 임원 가운데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허태수 회장이 거론된다. 허 회장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GS홈쇼핑(현 GS리테일) 최고재무책임자(CFO)로 활약했다. 단순히 자금 리스크를 관리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회사 전략에 부응하는 행보를 드러냈다.
2005년 중국 법인 '충칭GS쇼핑'을 세운 사례가 돋보였다. 당시 3년에 걸쳐 1000만달러(102억원)를 투자하는 계획을 세웠다. 글로벌 시장 진출을 모색하는 회사 비전에 부응했다. 내수 영역에서 텔레비전(TV) 홈쇼핑 사업의 성장세가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수익원을 늘리자는 목적을 반영했다.
이후 허 회장은 CFO 경험을 발판 삼아 GS홈쇼핑 대표에 올랐다. 재임 중 케이블 방송사를 매각하면서 재무 관리와 사업 전략을 융합하는 기조를 드러냈다. GS홈쇼핑은 2010년 10월에 울산방송과 강남방송 지분을 C&M으로 넘겼다. 3930억원을 확보했는데, 두 회사에 최초 투자한 금액 2121억원과 견줘보면 멀티플 1.8배 수익을 실현했다.
울산방송과 강남방송은 허 회장이 CFO로 근무하던 2004년과 2006년에 계열사로 편입됐다. GS홈쇼핑은 두 업체가 전국에서 가입자당 매출(ARPU)이 상위권에 속하는 유선방송사업자(SO)라는 대목을 눈여겨봤다. TV 채널을 활용한 상품 판매 영역에서 확고한 우위를 점하려면 케이블 방송사와 사업 시너지를 내야 한다는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4년 만에 유통업 트렌드는 빠르게 변했다. 인터넷TV(IPTV)가 등장하고, 스마트폰이 속속 보급됐다. 허 회장은 모바일 플랫폼으로 제품을 파는 전자상거래(이커머스)가 대세로 자리매김할 거라고 확신했다. 케이블 방송 업체 지분을 팔아 얻은 실탄은 온라인 부문에 투입됐다.
재무와 사업 전략을 함께 중시하는 허 회장의 스타일은 뒷날 그룹 CFO 중용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올해 초 지주사 ㈜GS 재무팀장으로 부임한 이태형 전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전무는 2014년과 2020년 두 차례나 GS에너지 경영기획부문장을 지냈다. 지난해 GS리테일 경영지원본부장에 오른 김원식 전무 역시 GS홈쇼핑 시절 해외전략사업부장으로 활약한 경험을 갖췄다.
◇'주주친화적 CFO 모범' 허명수 前 부회장허창수 명예회장의 셋째 동생인 허명수 전 GS건설 부회장은 주주 친화책을 실행하는 데 공들인 CFO였다. 허 부회장이 GS건설과 연을 맺은 시점은 2002년이다. 20여년간 몸담은 LG전자를 떠나 GS건설(옛 LG건설)로 자리를 옮겨 맡은 직책은 경영지원본부장이었다.
CFO로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GS건설의 배당성향은 국내 건설업계 1위를 지켰다. 2004년에는 당기순이익의 39.9%를 배당으로 지급했을 정도다. 주당 배당금은 꾸준히 늘었다. 2002년 800원에서 △2004년 1250원 △2005년 1400원 △2006년 1550원으로 올랐다. 근간에는 "회사의 주인은 주주이며, 벌어들인 돈을 주주와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았다.
해외 IR 로드쇼를 열어 기관이나 국외 투자자와 소통하는 데도 힘썼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에 북미, 유럽, 아시아 각지로 임직원이 돌아다녔다. JP모건, 크레디트스위스, 메릴린치증권 등과 협력 관계를 형성했다.
건설 분야 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통합공사관리시스템(TPMS)'을 도입한 대목 역시 허 부회장의 작품이었다. 일일 단위로 공정 상황을 살필 수 있는 만큼 공사에 쓸 자재량과 인원, 투입 장비의 숫자를 산출하는 데 기여했다. 디지털 기술을 연계해 비용 통제의 효율성을 높인 셈이다.
일련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덕분인지 GS건설 주식 가격은 우상향을 이어갔다. GS건설에 처음 몸담을 당시인 2002년 3월만 하더라도 주가는 1만3000원~1만5000원을 형성했다. CFO 직무를 마친 2006년 12월 GS건설의 주식은 8만원대였다. 4년여 만에 주가가 5배 넘게 뛰었다. 드라마틱한 성과에 힘입어 허 부회장은 한국CFO협회가 주관하는 '2006년 CFO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허 부회장이 재무 총괄 임원으로 활약할 당시 한솥밥을 먹은 실무자 중 한 사람으로 김태진 GS건설 재무본부장(부사장)이 눈길을 끈다. 2002년에 입사한 이래 세무회계팀장, 재무지원담당, 재경담당 등을 거쳤다.
김 부사장도 2018년 CFO로 부임한 뒤 주주가치 제고책에 관심을 기울였다. GS건설의 배당성향이 취임 첫해 13.5%에서 △2019년 17.9% △2020년 30.8% △2021년 27%로 변화한 사례가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