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4세 경영 승계 포기가 이행된다면 삼성은 '소유와 경영의 분리'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는 오너 일가가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의 지분은 갖되 회장직을 포함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삼성은 이병철 창업회장과 2세 이건희 전 회장의 강력한 오너십이 지배하는 구조에서 '글로벌 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회사다. 삼성에 '오너 없는 전문경영인체제'가 들어서는 그림을 가정해 보면 지금은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선언을 이행한다면 이 회장이 만들어 나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오너없는 전문경영인 체제의 단점을 보완하고 그룹의 혼란을 최소화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삼성의 거버넌스 개혁은 어떻게 이뤄질까.
◇주인 없는 회사 폐단이 우려된다 일각에서는 1969년 창업 이후 유지돼 온 삼성의 오너 경영 체제가 막 내리면 외풍에 쉽게 흔들리는 취약한 구조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포스코나 KT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최고경영자(CEO)가 교체되는 등 정치 외풍과 압력에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하지만 KT나 포스코의 경우 공기업에서 민영화된 사례다. 국민연금공단을 비롯한 기관이 주요 주주다. 민간기업인 삼성과는 다르다. 삼성의 경우 오너 승계가 끊어진다고 해도 지분 상속은 이뤄진다. 삼성가(家)가 주주로 남기 때문에 포스코나 KT의 지배구조와는 달라질 수 있고, 달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그룹 핵심인 삼성전자의 경우 오너 일가가 직접 보유한 지분은 5.54%(올해 3분기 말 기준)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삼성전자를 지배하는 삼성물산과 삼성생명의 대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경영권 승계를 하지 않겠다는 건 오너 일가가 회장을 비롯한 어떤 직함을 갖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총수가 없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지분은 남는데, 이는 주주로서 권리가 남는다는 의미다. 총수 없는 삼성전자에 어떤 거버넌스 구축이 가능할까. 전문가들은 이사회에 답이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원장을 지낸 조명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삼성가가 경영에서 빠진 뒤) 가장 심플한 것은 (오너 일가가)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의 이사회 이사로 참여해 전문경영인을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승계 포기 이후, 이사회는 어떻게 바뀔까 4세로의 경영권 승계는 안 되더라도 이 회장과 가족들이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등 지분을 보유한 계열사의 이사회에 참여해 창업주 가문으로서 회사를 지키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외풍을 막고 전문경영인을 지원하고 감독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오너 일가가 직접 등기이사가 되지 않고 재단을 활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이 회장이나 4세가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재단에서 파견하는 인사가 기타비상무이사 직책으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다.
조 교수는 "직접하든, (재단을 통한) 대리인을 내세우든 감독을 해야 한다"며 "아무 영향력 없는 대주주로 남아 있는 건 주주로서 오너일가에도, 회사에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현행법상 재단의 경우 의결권 주식을 5%만 보유할 수 있다는 제한은 있다.
김규식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도 "오너가 이사회 일원이 돼 장기적 관점에서 회사 경영진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이사회에는 창업주 가문처럼 주식을 안 파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중요한 역할은 최고경영자(CEO) 등 전문경영인을 공정하게 선임하는 일이다. 누가 진짜 유능한 경영진인지, 장기적으로 회사 발전에 크게 기여할 인물이 누구인지 창업자 가문이자 주주로서 선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미국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 AMD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이사회에서 절박하게 연구해서 현재 CEO인 리사 수를 영입했고 그가 AMD를 살려냈다. 삼성전자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경영 승계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더 이상 지배주주가 아니라는 말이며, 지배주주란 이사회의 과반수를 선임하는 권능을 가진 주주를 말한다"며 "(오너가 경영권을 내려놓겠다고 했으면) 창업주 가문이 지명하는 이사가 과반수를 넘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현재 이사회는 사실상 지배주주(오너)가 선임하는 이사들만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를 개혁하는 게 핵심이 될 것이란 설명이다.
일각에선 오너 없는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지 우려한다. 이 역시 이사회 개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사회 중심 경영이 정착한 애플 등 글로벌 기업의 사례를 롤모델로 삼을 수 있다.
이봉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는 "(오너 없는 전문경영인체제로의 전환 시) 혼란은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건 기우일 수 있다"며 "예를 들어 오너가 없어 대규모 투자결정이 어렵다는 건 (경영이) 시스템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오너가 좌지우지하는 구조란 얘기다. 시스템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SK그룹도 SK수펙스추구협의회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최태원 회장은 대외활동에 집중하지 않느냐"며 "1968년생인 이 회장이 앞으로 최소 10년 이상 활동할 것이기 때문에 그사이 준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