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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셋그룹의 탄생

김슬기 기자  2024-12-11 07:35:53

편집자주

THECFO가 제공하는 '아카이브(Archive)'는 시장에서 벌어진 이슈의 발단과 결말을 기록한다. 기업의 현재를 만든 이정표적 사건은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전개됐을까. 사건의 방향성을 흔들어 놓은 주요 이벤트는 뭘까. 기사 한 건이 하나의 조각이라면 아카이브는 조각이 맞춰진 퍼즐이다. 거대 사건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관계를 아카이브가 담았다.

목차

1. 미래에셋그룹의 시작

1.1. 자본금 100억으로 800조 굴리는 대기업 됐다

1.2. 박현주의 도전, 내재된 창업 DNA

1.3. 벤처캐피탈로 시작, 운용·증권·보험 연이어 출범

2. 국내 펀드 열풍 시작

2.1. 국내 최초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 출시

2.2. '디스커버리·인디펜던스'에서 적립식 펀드까지

3. 인수합병(M&A)으로 키운 운용·증권·보험

3.1. SK·세종투신 인수로 시작된 운용 M&A

3.2. SK생명 인수로 시작된 생명보험 성장

3.3. 국내 1위 대우증권 인수로 초대형 증권사 탄생

4. 설립 30년 앞둔 미래에셋그룹, 현 지배구조는

4.1. 대부분 떠난 창립 멤버들, 2인자 최현만도 퇴진

4.2. 박현주 가족회사 미래에셋컨설팅, 지배력 강화 기반

최초 문서 작성일 : 2024년 12월 11일

1. 미래에셋그룹의 시작접기



1.1. 자본금 100억으로 800조 굴리는 대기업 됐다접기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홍콩법인 회장이자 미래에셋증권 글로벌경영전략고문(GSO·Global Strategy Officer)은 국내 금융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미래를 향한 유니크한 투자 철학을 가진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미래에셋의 본질"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했고 현실로 이뤄냈다.

1997년 자본금 100억원을 가지고 시작했던 미래에셋그룹은 2024년 재계 서열 20위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커졌다. 현재 그룹의 자기자본은 20조9000억원, 운용하는 고객자산만 800조원이 넘는다. 주요 계사로는 미래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증권, 미래에셋생명, 미래에셋금융서비스, 미래에셋벤처투자,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컨설팅 등이 있다.

1.2. 박현주의 도전, 내재된 창업 DNA접기



미래에셋그룹을 이야기할 때 박현주 창업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1958년생인 그는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평동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광주제일고 입학 통지서를 받던 날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사춘기를 방황하며 보냈다.

그는 1978년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강의에서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증권시장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인 1985년 내외증권연구소를 만들면서 금융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알음알음 친구의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영업했고 일본 증권 역사에 관한 책을 얻어 일본 자본시장의 발달 과정을 통해 투자에 관한 힌트를 얻기도 했다. 나름의 분석을 통해 주식 투자를 하면서 입소문이 났고 가치투자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당시 투자자문사 설립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었던 데다가 개인 브랜드에 한계를 느끼면서 1986년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 영업부로 입사했다. 본인의 롤모델인 이승배 영업상무(현 한셋투자자문 사장)에게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가 창업을 위해 회사를 나가자 1988년 다시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계열사인 한신투자자문으로 이동했다. 3000억원 가량의 회사 자금을 운용하면서 자산운용에 매진했을 때 1989년 영업점 발령을 받게 됐다.

1991년 33살이 되던 해 최연소 중앙지점 지점장이 됐고 해당 점포를 1위 점포로 만들었다. 이때 함께 했던 이가 최현만 대리(전 미래에셋증권 회장, 현 고문), 구재상 대리(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 현 케이클라비스 회장)였다. 이들은 박 GSO와 함께 미래에셋을 성장시킨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이후 1994년 압구정 지점장, 1995년 강남본부장(이사)이 됐다. 증권업계 최고 영업맨이 됐지만 다시 창업의 길을 선택했다. 강남본부 내 압구정지점장 구재상, 서초지점장 최현만 등과 함께 회사를 나왔다.

1.3. 벤처캐피탈로 시작, 운용·증권·보험 연이어 출범접기



그는 1997년 6월 자본금 100억원으로 미래에셋창업투자(현 미래에셋캐피탈)을 설립했다.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감사보고서(2000년)를 살펴보면 박 GSO의 지분은 21.92%였고 전홍의 지분율은 21.43%였다. 전홍은 1975년 설립된 회사로 주요 공항과 야구장, 지하철 등을 대상으로 광고 대행 사업을 한다. 박정하 대표는 박 GSO와의 개인적인 인연으로 초기 투자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7월에는 자본금 10억원으로 미래에셋투자자문을 설립했다. 자산운용업으로 시작하고 싶어 했으나 당시 인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하지만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여파로 자산운용업의 설립 규정이 납입자본금 100억원으로 낮춰지면서 1999년 미래에셋자산운용투자자문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미래에셋벤처캐피탈이 지분 50%를 가지고 있었다.

1997년 11월 박 GSO의 개인회사인 한국파이낸셜컨설팅(향후 케이알아이에이·KRIA)도 만들어졌다. 1999년말 기준 박 GSO의 지분율은 48%, 배우자인 김미경 씨 지분이 11.3%, 하민·은빈·준범 등 자녀들이 각각 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해당 회사를 통해 그룹 계열사 지분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었다. 2010년 미래에셋컨설팅(2008년 설립)에 흡수 합병됐다.

1999년에는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했다. 당시 미래에셋캐피탈(44.89%)이 최대 주주로 들어가 있었다. 2005년 6월에는 미래에셋생명보험이 출범했다. 미래에셋그룹의 핵심계열사들이 그룹 출범 10년도 채 되지 않아서 일사불란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2. 국내 펀드 열풍 시작접기



2.1. 국내 최초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 출시접기



1998년 12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국내 최초 뮤추얼 펀드인 '박현주 1호'를 선보였다. 만기 1년의 폐쇄형이었다. 삼성증권 창구를 통해 판매했고 2시간 30분 만에 500억원 한도가 모두 팔렸다. 펀드 설정 이후 증시가 살아나면서 출시 7개월 만에 100% 수익률을 돌파했다. 1999년 12월 9일 만기 청산 당시 최종 수익률은 95%였다. 첫 펀드의 성공은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국내 최대 자산운용사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다만 뒤이어 나온 '박현주 2호'에서는 쓴맛을 봤다. 1999년 12월 박현주 2호에는 3000억원 가량이 몰렸다. 1999년 12월 1000대였던 코스피 지수는 2000년 500대까지 내려앉았다. 박현주 2호 역시 급락장을 이기지 못했고 2000년 12월 마이너스(-) 44.92%로 청산됐다.

박현주 2호 펀드의 실패로 폐쇄형 펀드의 한계와 국내 자산에만 투자할 수 없다고 느꼈다. 박 GSO는 2001년 3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하버드 대학에서 전략에 관한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6개월간 하루 10시간씩 영업공부를 하고 네트워크를 다지며 미래에셋을 아시아의 대표적인 투자그룹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됐다. 2003년 12월 국내 최초 해외 운용법인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 법인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2.2. '디스커버리·인디펜던스'에서 적립식 펀드까지접기



2001년 1월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국내 최초 개방형 뮤추얼펀드 인디펜던스 펀드를 출시했다. 같은 해 7월 디스커버리 펀드도 나왔다. 또 '장기 수익률이 높은 펀드에 장기 투자해 노후를 준비하자'는 생각으로 2003년 '3억 만들기'라는 적립식 펀드를 선보이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광주일고 선배였던 김정태 당시 국민은행장의 도움으로 은행을 판매채널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시중은행들을 중심으로 국내 적립식펀드 열풍이 불면서 2007년 말 인디펜던스·디스커버리 시리즈 펀드의 설정액은 16조원에 달했다. 이 펀드들은 운용 7년 만인 2007년 1000%에 가까운 누적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바야흐로 주식형 펀드의 전성시대였다. 2000년 4조원대였던 국내 주식형펀드 자산은 2007년말 135조원까지 커졌다. 이 중 3분의 1이 미래에셋 펀드였다.

2007년 10월에는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인사이트 펀드를 내놨다. 전 세계 유망 자산군에 골고루 분산투자 하겠다는 컨셉으로 출시됐다. 판매 보름 만에 4조원이 넘는 자금이 들어왔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펀드 전성시대도 끝이 났다.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치면서 수익률이 하락했고 투자자 환매 등으로 어려움이 컸다.

특히 인사이트 펀드는 당시 가파른 성장세를 보였던 중국 시장에 대한 비중이 높았다. 투자할 때만 해도 상하이종합지수가 가파르게 올랐지만 글로벌 금융위기가 겹치면서 급락했다. 설정 1년 만에 마이너스(-)55% 수익률을 기록했다. 박 GSO는 설정 5년이 지나도록 원금 회복이 안 되자 2012년 1월 신문광고를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3. 인수합병(M&A)으로 키운 운용·증권·보험접기



3.1. SK·세종투신 인수로 시작된 운용 M&A접기



미래에셋을 키운 원동력은 적기에 이뤄진 M&A 였다. 미래에셋그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산운용 역시 M&A를 통해 성장했다. 2024년 6월말 기준으로 미래에셋자산운용은 국내법인 201조원, 해외법인 154조원 등 총 운용자산 355조원까지 증가했다.

시작은 2004년이었다. 세종투자신탁운용과 SK투자신탁운용이 대상이었다. 세종투신은 자본금 200억원, 운용자산 약 4000억원대의 소형사였다. SK투신은 자본금 300억원, 운용자산 2조원 안팎의 중견 운용사였다. 당시 SK그룹은 SK글로벌 분식회계 사태로 내홍을 겪으면서 금융부문을 매각해야만 했다. 두 회사를 인수하면서 수탁고를 7조원대까지 늘렸고 2004년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주식형,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은 부동산·사모펀드·채권 등 대체 투자를 전담하는 등 투 트랙 전략을 썼다. 2012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미래에셋맵스자산운용을 흡수 합병하면서 운용자산이 60조원까지 늘어나게 됐다.

이후 2011년 캐나다 상장지수펀드(ETF) 운용사인 호라이즌 베타프로(BetaPro), 2016년 KDB자산운용(이후 멀티에셋자산운용), 2018년 미국 ETF 운용사인 글로벌 X(Global X), 2022년 호주 ETF 시큐리티스를 인수하면서 글로벌 자산운용사로 자리매김했다. 2023년에는 호주 로보어드바이저 전문 운용사인 스탁스팟(Stockspot)도 인수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자체적 역량으로 성장하는 전략(organic growth)과 M&A를 통해 전략적으로 성장해 왔다. 특히 2010년대 이전 주식형 펀드(액티브)에서 2010년대 이후 인덱스 펀드(패시브)로 전략을 이동했다. 현재 전 세계 13개 지역에 글로벌 ETF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고 2024년 6월말 기준 총 588개의 ETF 상품, 1270억달러 규모의 ETF를 운용 중이다.

해외 부동산 투자에도 적극적이었다. 2004년 국내 최초로 부동산펀드를 선보였고 2006년 중국 상해 푸둥지구에 위치한 오피스(미래에셋상해타워)로 국내 최초 중국 본토 빌딩 투자에 나섰다. 이후 미국, 호주, 유럽 등에 있는 호텔, 리조트, 인프라 등 투자를 단행하면서 적극적으로 글로벌 부동산 펀드를 선보였다. 다만 코로나19 이후 수익성 악화와 미국 연방공개시위원회(FOMC) 금리 인상 등으로 관련 자산 가치가 떨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3.2. SK생명 인수로 시작된 생명보험 성장접기



박 GSO는 금융업을 하면서 보험은 반드시 함께해야 하는 비즈니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금융권 내에서도 보험만큼 장기적인 성격을 가진 사업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셋그룹은 2004년 SK투신을 계기로 SK그룹과 인연을 맺었고, 당시 인수를 검토했던 메트라이프가 인수를 포기하면서 2005년 SK생명을 품에 안았다. 인수 후 사명이 미래에셋생명이 됐다. 인수 주체는 미래에셋캐피탈이었다. 지분 97.6%를 인수하는데 약 1600억원을 들였다.

이후 2011년 7월 국민연금, 사학연금, 우정사업본부, 오릭스 등이 포함된 '오릭스-LTI PEF(사모투자펀드)' 등 재무적투자자(FI)를 대상으로 전환우선주(CPS)와 상환전환우선주(RCPS)를 발행해 총 4000억원 규모의 프리IPO를 진행했다. 외부 투자를 받았던 만큼 기업공개(IPO)도 진행했다. 2012년 상장 주관사를 선정했고 2013년 한 차례 상장을 연기한 뒤, 2015년 7월 주당 7500원, 총 3405억원 규모로 일반 공모를 진행했다.

상장 후 미래에셋생명은 PCA생명 M&A로 또 한 번 도약의 계기를 맞이한다. 2016년 11월 PCA생명 지분 100%를 1700억원에 인수하는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2017년 5월 금융위원회의 승인을 받았고 2018년 3월 통합 미래에셋생명이 출범했다. 양사의 합병으로 미래에셋생명의 자산규모는 2017년말 29조원에서 34조7000억원까지 늘어나면서 생명보험사 자산 6위에서 5위로 올라갔다.

비슷한 시기인 2017년 7월 베트남 현지 생명보험사인 프레보아베트남생명보험(Prevoir Vietnam Life Insurance)와 지분 매매계약을 체결하면서 사업 영토를 늘렸다. 약 517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지분 50%를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2016년 베트남 NCB은행과 단독 제휴를 맺는 등 방카슈랑스 영업에 집중했다. 진출 이후 미래에셋프레보아생명은 국제금융대상 시상식에서 5년 연속 '베트남 최고 생명보험 파트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3. 국내 1위 대우증권 인수로 초대형 증권사 탄생접기



미래에셋증권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우증권 인수라고 할 수 있다. 대우증권은 1970년 설립된 동양증권이 전신으로 삼보증권과 합병, 대우증권으로 사명 변경됐다. 1999년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 압도적인 1등 증권사였다. 2000년 5월 한국산업은행으로 최대주주가 바뀐 뒤 업계 2위로 밀려났지만 '증권 사관학교'라는 명성은 여전했다. 2015년 산업은행이 대우증권 매각계획을 결정했다.

2015년 당시 대우증권의 자기자본은 4조3049억원이었고 미래에셋증권은 3조4620억원이었다. 미래에셋증권은 2015년 12월 대우증권 매각 본입찰 때 2조4000억원을 써내면서 경쟁자였던 한국금융지주(2조2000억원), KB금융지주(2조1000억원)을 따돌렸다. 향후 실사 과정을 마친 후 한국산업은행에 보유한 43%의 지분을 2조3205억원에 인수했다.
*2016년 4월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포시즌스 호텔에서 진행된 대우증권 임직원의 업무보고에 앞서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오른쪽)이 당시 홍성국 대우증권 대표이사에게 미래에셋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대우증권을 인수하게 되면서 단숨에 자기자본 7조8000억원대의 초대형 증권사로 탈바꿈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2016년 5월 미래에셋대우로 사명을 바꿨고 같은 해 12월 기존 미래에셋증권을 흡수 합병했다. 당시 미래에셋대우와 미래에셋증권과의 합병비율은 1:2.9716317로 최대 주주가 미래에셋증권에서 미래에셋캐피탈로 변경됐다.

국내 자기자본 1위로 올라서면서 2017년 7월 금융위원회로부터 초대형 투자은행(IB) 지정은 받았지만, 단기금융업(발행어음) 인가를 받진 못했다. 초대형 IB 지정은 자기자본 4조원 이상, 인적·물적설비, 이해상충 방지 체계 등의 지정 요건 등을 갖추면 된다. 핵심은 단기금융업인데 인가에 시일이 걸렸다.

이는 2017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일감 몰아주기 조사로 인해 인가안 심사가 중단된 영향이 컸다. 2018년 5월 공정위가 검찰 고발 없이 시정명령과 과징금만 부과하는 등 심사 중단 사유가 해소되면서 금융당국 심사가 재개됐다. 2021년 5월이 되어서야 금융위가 단기금융업 인가를 의결하면서 국내 증권사 중 네 번째 발행어음 발행이 가능해졌다. 같은 해 사명도 미래에셋증권으로 바꿨다.

미래에셋증권은 2024년 3분기말 기준 연결 자기자본 11조4579억원, 별도 자기자본 9조7909억원으로 국내 1위다. 2021년 순이익 1조원을 넘겼고 2023년에는 3378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현재 미국, 유럽, 남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전 세계 11개 지역에 진출해 있다. 지난 11월에는 미래에셋증권이 5886억원에 인도 현지 증권사 쉐어칸 인수를 완료했다. 미래에셋증권은 2027년부터 글로벌 사업을 통해 세전이익 5000억원 이상을 창출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기도 했다.
*미래에셋그룹 글로벌 사업 현황

4. 설립 30년 앞둔 미래에셋그룹, 현 지배구조는접기



4.1. 대부분 떠난 창립 멤버들, 2인자 최현만도 퇴진접기



박 GSO가 1997년 6월 회사를 창업할 때 함께 했던 이는 8명으로 알려져 있다. 최현만 고문(전 회장), 구재상 케이클라비스 회장, 최경주 전문위원(전 미래에셋운용 부회장), 강길환 미래에셋증권 혁신추진단 사장, 선경래 지앤지인베스트 대표, 송상종 피데스자산운용 대표, 이병익 전 오크우드투자자문 대표 등이다.

그중에서도 최측근으로 분류됐던 인물은 최현만 고문과 구재상 케이클라비스 회장이다. 한때 시장에서는 '좌(左)현만, 우(右)재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현만 고문의 경우 그룹 내 핵심 계열사를 두루 거쳤고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2023년 11월 물러났고 현재 고문으로 남아있다.

구 회장은 1964년생으로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동원증권에 입사했다. 동원증권에서 박 GSO를 만났고 만 32살에 압구정지점장이 됐다. 1997년 박 GSO와 함께 나왔고 그해 미래에셋자산운용 운용 담당 상무가 됐다. 2000년 미래에셋투신운용(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에 흡수합병) 대표이사, 2002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2010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이 됐다.

특히 그가 있을 당시 박현주 펀드, 인디펜던스, 디스커버리 등 미래에셋운용의 주요 펀드가 나오는 등 운용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2012년 돌연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그룹을 떠났다. 이듬해인 2013년 케이클라이스를 설립했고 산하에 케이클라비스자산운용과 신기술사업금융을 하는 케이클라비스인베스트먼트를 거느리고 있다.

최현만 고문의 경우 창립 멤버로 그룹의 성장을 함께했다. 최 고문 역시 동원증권 시절 박 GSO와 인연을 맺었다. 박 GSO가 서초지점장으로 발탁했고 그룹의 시작을 함께 했다. 1997년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 1999년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사장, 2007년 12월 미래에셋증권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고 2012년 그룹 수석 부회장이 됐고 생명과 증권 모두 이끌었다. 2021년 12월 대표이사 회장에 올랐다.

2023년 11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고 현대글로비스 사외이사로 있다. 그는 창업 공신이었던 만큼 비상장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과 미래에셋캐피탈 등의 지분을 보유했었다.

미래에셋자산운용 지분(지분율 2.17%, 29만5055주)의 경우 박 GSO의 가족회사인 미래에셋컨설팅이 2023년 11월 전량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 450억원 정도였다. 미래에셋캐피탈의 경우 24만9480주, 0.98%에 해당하는 지분을 보유했었다. 다만 해당 지분의 경우 매각 여부를 알 수 없다. 비상장사지만 시장에서는 지분가치를 650억원 정도로 보고 있다.

4.2. 박현주 가족회사 미래에셋컨설팅, 지배력 강화 기반접기



미래에셋이라는 거대 금융그룹의 지배구조는 어떨까. 그룹은 박 GSO를 중심으로 지분 구조가 이어져 있다. 2024년 3분기말 기준(보통주) 박 GSO는 미래에셋자산운용 지분 60.19%를 보유하고 있고 미래에셋캐피탈 지분 34.32%를 가지고 있다. 미래에셋캐피탈은 미래에셋증권 지분 30.70%를 보유하고 있고, 증권은 미래에셋생명(22.01%)과 미래에셋벤처투자(56%)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2008년 설립된 미래에셋컨설팅도 지배구조에서 빠질 수 없는 회사다. 2008년 9월 KRIA에서 인적 분할된 회사로 부동산 임대·관리사업, 인프라금융자문사업, 숙박 및 부대시설의 운영을 하고 있다. 2010년 12월 KRIA를 흡수합병했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 코트야드 메리어트 서울 판교 등을 운영하고 있고 자회사 와이케이디밸롭먼트(YKD) 통해 여수경도 해양관광단지 개발사업 등을 하고 있다.

사업적인 측면보다는 그룹 내 주요 계열사 지분을 보유한 실질적인 투자회사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24년 2분기말 기준 미래에셋컨설팅은 미래에셋캐피탈 지분 9.98%, 미래에셋생명보험 4.27%(보통주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 36.92% 등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박 GSO는 개인지분과 미래에셋컨설팅을 통해 보유한 계열사 지분으로 미래에셋그룹을 지배하고 있다.

2024년 1분기말 미래에셋컨설팅의 주주는 박 GSO가 48.63%, 배우자인 김미경씨가 10.24%, 박 GSO의 세 자녀와 동생, 조카 등이 지분을 나눠서 보유하고 있다. 미래에셋희망재단은 4.99%를 보유 중이다. 다만 2023년 12월 박 GSO는 미래에셋희망재단과 기부약정서를 체결, 보유 주식 25%까지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단 '공익법인 관련 규제 완화 이후'라는 단서를 붙였다. 이는 2세 경영이 아닌 전문 경영인 체제를 약속한 박 GSO의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행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증세법)은 공익법인이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을 5% 이상(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기준) 출연받을 때 최대 60%의 상속·증여세를 부과한다. 또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은 공익법인을 통한 계열사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고 있다. 향후 규제 완화가 된 후 지분을 기부하게 되면 박 GSO는 2대 주주로 내려오게 된다. 재단 의결권이 제한되더라도 박 GSO가 최대 주주다.
  • [1]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하는 2024 공시대상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보면 미래에셋의 공정자산총액은 232조원 규모다.
  • [2] 박현주 GSO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부친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의사가 되겠다며 이과를 지망했지만 재수할 때 문과로 진로를 틀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 [3] 박현주 GSO는 자서전을 통해 펀드를 청산하던 날, 폭음하며 통곡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 [4] 2024년 12월 기준 인디펜던스 펀드의 설정 후 수익률은 21%, 디스커버리 펀드의 설정 이후 수익률은 877%다. 같은 기간 벤치마크는 각각 24%, 322%다. 설정된 지는 두 펀드 모두 23년째다.
  • [5] 2014년 11월이 되어서야 원금 회복에 성공했다. 2024년 12월 누적수익률은 129%고 벤치마크는 297%이다.
  • [6] 2024년 3월 미래에셋자산운용에 흡수합병됐다.
  • [7] 사명을 바꾼 후에는 타사와 차별화하는 데 집중했다. 상품에서는 운용에 강점을 살려 투자형 보험인 변액보험을 선보였다.
  • [8] 발행어음은 자체 신용을 바탕으로 만기 1년 이내인 단기어음을 발행·매매·인수하는 금융업무를 말한다.
  • [9] 단기금융업 인가를 받으면 발행어음을 자기자본의 최대 200%까지 조달할 수 있다.
  • [10] 당시 공정위는 미래에셋그룹 계열사들이 펀드를 만들어 포시즌스서울호텔, 블루마운틴컨트리클럽에 투자한 뒤 미래에셋컨설팅에 임대관리 수익 등을 몰아줬다고 봤다.
  • [11] 금융업계에서의 상징성이 큰만큼 현업 복귀 영입 제안도 많았으나 미래에셋그룹과의 인연이 깊었던 만큼 자리를 모두 고사했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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