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사모투자펀드(PEF) 제도 도입 이후 20년이 흘렀다. 국내 연기금·공제회들은 그사이 든든한 LP풀을 구축해 국내 GP들의 성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인구구조의 변화로 연기금·공제회들의 성숙도가 높아지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더벨이 연기금·공제회의 글로벌 경쟁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지목된 거버넌스 이슈를 짚어보며 개선 방안을 살펴본다.
국내 연기금·공제회의 대체투자 역사가 20년이 다 돼가지만 여전히 1년 단위로 성과를 공개하고 있는 점도 글로벌 경쟁력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장기간 성과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국내 대체투자 시장이 성장했지만 여전히 단기 위주의 성과가 강조되면서 투자 성과가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국내 연기금과 공제회는 대부분 투자기관이지만 정부 부처의 통제를 받는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딜레마도 발생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다. 투자 업무 특성상 비효율이 높아질 것이 뻔하지만 공공기관의 책무가 강조되면서 이제는 선거철마다 단골 공약으로 등장하고 있다.
◇짧은 임기에 '단기 성과' 집중, "성과 평가도 어려워"
국민연금은 3년 단위 평가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1년 단위 성과도 꾸준히 공개하고 있다. 다른 공제회, 연기금의 경우에도 1년 단위 성과를 공개하고 있다. 일부 기관은 이를 평가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기관마다 포트폴리오가 다르지만 해마다 나오는 연기금·공제회의 성과 결과를 바탕으로 '줄세우기'를 하는 현상도 발생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 같은 단기 중심의 성과 공개가 장기 투자가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대체투자의 경우 1년 단위 성과를 공개하는 것은 성과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 투자 성과는 프로젝트펀드 투자의 경우 3~5년 만에 회수하는 경우도 있지만 블라인드펀드는 펀드 청산까지 10년이 걸리는 사례도 있다. 이 때문에 1년 단위 성과를 공개하는 것은 CIO의 짧은 임기와 맞물려 무리한 투자나 단기 성과가 날 수 있는 투자 위주로 포트폴리오가 구성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민, 회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성과를 공개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단기 실적 위주의 평가는 오히려 포트폴리오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며 “국내 사모펀드 제도가 정비된 지 20년이 지나면서 국내 연기금, 공제회들도 10년 단위의 성과를 공개할 여력이 갖춰졌으니 단기 수익률보다 장기 투자 수익률을 공개하는 방향으로 틀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잦은 운용역 교체도 문제점으로 거론된다. 전문 계약직으로 운용역을 뽑는 기관도 있지만 일부 국내 연기금·공제회의 경우 기금운용 부서와 일반 부서 간 순환보직제를 적용하고 있다. 이에 투자를 맡는 실무진은 2~3년 주기로 교체된다. 투자 이후 회수까지 최소 5년 정도가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투자·관리·회수를 모두 다른 담당자가 맡게 되면서 투자 건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책임감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잦은 순환과 짧은 임기로 객관적인 성과 판단도 어려운 구조다. 전직 한 CIO는 “특히 대체투자는 긴 안목으로 투자해야 하고 투자부터 엑시트까지 일관되게 관리 해야하는데 CIO뿐만 아니라 담당자들도 짧게 머물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투자, 관리, 엑시트하는 사람이 모두 달라 어느 사람이 성과를 냈다고 평가하기에도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한 현직 CIO는 “내부적으로도 순환보직제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은 있지만 이른바 ‘갑’으로 일할 수 있는 투자부서에 대한 인기가 높고 내부를 잘 아는 인재를 키운다는 측면에서 순환보직제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며 “운용역들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큰 틀에서 구획을 나눠 해당 분야 안에서만 순환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고려해 봐야한다”고 말했다.
◇끊이지 않는 '지방 이전 리스크', 투자 전문 기관보다 '공공기관' 방점
공공기관이라는 특성 때문에 지방 이전 대상에 매번 오르내리는 것도 인재 유출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은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에 따라 본사를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전했다. 국민연금은 2015년 전북 전주시로 본사를 옮겼다. 자금을 굴리는 기금운용본부도 함께 갔다. 이후 해마다 고질적인 운용역 이탈 문제가 이어지고 있다. 임금체계 현실화 등을 통해 인력 충원을 위해 공을 들이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산업은행 마찬가지다. 산업은행은 부산 이전이 결정되자 20~30대 직원들을 중심으로 인력 이탈이 이어지고 있다. 다만 산업은행 노조의 강한 반발이 이어지고 있는 데다 마지막 단추인 법개정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면서 부산 이전은 미뤄지고 있다.
본사가 이전하면서 일부 인력을 서울에 남긴 기관도 고충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영등포구에 있던 사학연금공단은 2014년 전남 나주시로 본사를 이전했다. 본사 이전에도 사학연금 자금운용단은 서울 여의도에 남았다. 하지만 서울 잔류 인원이 10년 동안 묶이면서 투자 전문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당시 국토교통부는 서울 잔류 인원을 45명으로 설정했다. 2014년 13조원 규모였던 운용자산은 지난 10년 동안 26조원까지 2배 가량 늘었지만 잔류 인원은 변함이 없다.
본사 이전에 따른 인력 유출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여전히 서울에 있는 연기금, 공제회들의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해야한다는 주장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국부펀드 한국투자공사(KIC)의 '전주 이전설'은 정치권 단골 공약 중 하나다. 올해 4월 치러진 총선을 앞두고는 ‘7대 공제회’ 지방 이전이 공약으로 나오기도 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공공기관 지방 이전을 통한 지역 살리기라는 명분은 이해하지만 지방에서는 투자를 위해 국내외 운용사를 만나는 것부터 쉽지가 않다”며 “인력 유출뿐만 아니라 투자 효율 측면에서도 손실이기 때문에 투자기관에 한해서는 공공기관보다 투자기관이라는 정체성에 더 집중하는 정책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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