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확정급여형(DB) 퇴직연금 운용 성과는 회사 부채 관리의 문제를 넘어 근로자들의 안정적인 노후 자금 확보와 맞닿아있다. 따라서 DB 사외적립금 투자 내용과 성과는 자금을 관리하는 CFO 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관심이 높을수 밖에 없다. 더벨은 기업들의 DB운용 현황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코스피 상장사이자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에스엘은 최근 2년여간 DB적립금의 거의 대부분을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다. 근래에는 시중은행과 금융지주 등이 발행한 월 이자 지급 옵션의 코코본드(조건부 신종자본증권) 투자 비중을 확대했다. 사모펀드 비히클을 통해 국내외 주식에도 적극 투자, 작년 한 해 5% 남짓 수익률을 달성했다.
9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에스엘의 지난해 말 현재 퇴직연금 확정급여형 사외적립자산은 3407억원으로 집계됐다. 같은 시기 확정급여부채는 3285억원으로 적립비중 104%를 기록했다. 에스엘의 2022년 말 적립비중은 108%이었지만 1년 새 소폭 하락했다. 에스엘 퇴직연금 사업자 수는 주간사인 미래에셋증권을 포함해 도합 11곳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스엘은 사외적립자산의 95%가량을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투자상품은 시중은행과 금융지주 등이 발행한 코코본드를 비롯해 증권사 ELB, 보험사 GIC 등 다양하다. 최근 2년 새 시중은행과 금융지주 등이 발행한 월 이자 지급 옵션의 코코본드를 복수의 퇴직연금 사업자를 통해 직접 매입해 운용하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시중은행과 금융지주는 작년 한 해 연이자 지급 옵션 코코본드를 집중 발행했다. 대부분 연이자는 4% 중후반대 수준으로 같은 시기 연 3%대 예·적금 이자보다 높은 데다, 피투자 자산 발행사 신용등급도 AA 이상으로 낮지 않다. 기준금리 인하 시그널이 뚜렷해질 경우 자본수익도 확보할 수 있어 DB 적립금 운용 비히클로선 매력적이었다.
에스엘은 실적배당형 상품 운용자산의 3% 미만 수준에서 사모펀드 비히클을 통해 국내외 증시에 투자를 집행하고 있기도 하다. 에스엘은 대표이사와 재무실장, 회계실장, 노동조합 관계자 등 회사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DB적립금 운용위원회를 8년여 전 신설한 뒤 매 분기 말 개최해 운용성과과 운용계획 등을 두루 논의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정책당국은 2022년 말 현행법 개정을 통해 상시근로자 300인 이상 DB 제도 채택 법인에 적립금 운용위원회를 의무 설치케 하고 DB적립금 최소 적립비중을 100%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에스엘은 현행법 개정 이전 자체적으로 위원회를 설치해 DB 적립금을 체계적으로 운용해 왔다는 점에서 퇴직연금 사업자 사이에서 오랜기간 회자되곤 했다.
에스엘 관계자는 "직원의 연금 재원인 만큼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안정성 확보에 있지만 동시에 효율적인 적립금 관리를 통해 수익성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며 "과거 저금리 상황 속에서는 연수익률 목표치를 3~5%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난해 말 고금리 기조 등 여러 환경 요건을 감안해 5%로 상향 조정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에스엘의 작년 한해 DB 적립금 운용 수익률은 대략 4% 중후반대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매년 운용 목표치를 꾸준히 달성하면서 추가 기여금을 적립한 결과 에스엘의 DB 적립자산은 최근 10년간 684억원(2014년, 적립비중 67%)에서 3285억원(지난해 말, 적립비중 104%)으로 5배 가까이 증가, 기업 재무 건전성 확보에 기여하고 있다.
에스엘이 사외적립자산 대부분을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입해 운용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5년 사외적립자산의 절반 이상을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투입한 뒤, 2020년 들어 그 비중을 80% 이상으로 확대했고 2022년엔 90%까지 끌어올렸다. 상당수 법인이 DB 적립금을 예·적금 등 원리금보장형 상품 위주로 운용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에스엘 DB적립금 운용 현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업자가 시장 상황에 맞춰 상품들을 추천하면 현업 부서가 재무 상황에 맞춰 주체적으로 상품을 선정해 운용하는 것"이라며 "기업 내 금융투자업계 출신 직원을 별도 채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 자체적으로 노력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1954년 삼립자동차공업을 모태로 삼고 있는 에스엘은 자동차 램프와 전동화 부품, 미러, 전자 등의 제품을 생산해 현대차와 기아차, GM, 포드 등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고 있는 기업이다. 작년 한해 영업이익은 3862억원으로 1년 전 1980억원에서 2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성엽 대표 부회장 일가가 전체 지분의 64.7% 정도로 회사를 지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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