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그룹 총수들의 타계 후 상속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 중 하나가 유언장 여부다. 유류분 제도 때문에 유언장이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경영권 승계와 지배구조 확립의 정통성 측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는 근거다.
다만 국내 재벌가 중에서 유언장을 남긴 회장님들은 의외로 드물다. 최근 10년간에는 롯데그룹이 예외사례로 꼽혔으나 이 또한 신뢰성 이슈가 불거졌다. 일각에선 유언대용신탁 등을 대안으로 내밀지만 국내에선 아직 제도 미비로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결국 기업집단 승계 및 지배구조 이슈는 유가족의 '합의'에 달려 있는 게 현실이다.
◇롯데·한진, 유언장 있어도 신뢰성 시비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2020년 1월 별세한 뒤 같은 해 6월 일본 도쿄의 사무실 금고에서 2000년 3월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유언장이 발견됐다. 2000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이 유언장에는 신동빈 회장을 후계자로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유언장은 일본 법원에서 상속인들의 대리인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개봉, 신 회장의 경영승계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물론 신동주 측에선 '법적인 의미의 유언 효력을 갖지 못했다, 별세 직후 유언장이 없다고 밝혔는데 5개월 지난 시점에 돌연 유언장을 발견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 매우 특이하며 부자연스럽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신동빈 회장에게 넘어갔다.
주요 그룹 회장님들의 경우 유언장이 거의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롯데는 다소 특이한 사례다. 이건희 삼성 회장, 구본무 LG 회장, 조양호 한진 회장의 경우 별세 후 유언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삼성과 한진은 법정비율대로, LG는 유가족 간 협의로 상속이 진행됐다. 그 밖에 상당수의 회장님들도 유언장을 남기지 않았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전통 재벌가에선 살아있는 회장의 사후를 언급하는 게 불경스럽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유언장이 있다 해서 분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고 조중훈 한진 창업회장의 경우 2002년 11월 타계한 뒤 공개된 유언장이 갈등의 불씨가 됐다. 당시 유언장에 따라 조양호 회장은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을 이끌었지만 2006년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과 조정호 메리츠그룹 회장 등이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유언장 조작을 주장, 소송을 제기해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소송은 조양호 회장의 승리로 끝났으나 형제간의 갈등을 결국 풀지 못했다.
아울러 법적 공증을 받은 유언장이라 해도 특정 후계자가 모든 것을 독식할 순 없다. 유류분 제도에 따라 유언이 있어도 상관없이 일정분을 남은 유족이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예컨대 두 아들이 있는 사람이 3억원의 재산을 장남에게만 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해도 차남은 법정상속분 1억5000만원의 절반인 7500만원의 유류분을 주장할 수 있다.
◇대안은 신탁?…관련제도 아직 미비해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의 특징은 회장 사후에 상속 및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는 타 그룹과 달리 신격호 명예회장이 생존해 있을 때부터 불거졌다는 점이다. 총수의 의사가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심신에 문제가 생길 경우 법원이 후견인을 정하고 중재자가 된다. 그렇지만 법원이 승계를 결정할 수는 없다.
유언장도 사후에 효력을 발생하는 만큼 생전에는 꺼내기가 어렵다. 신뢰성을 두고 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다소 있다. 경영권 승계 분쟁은 결국 지배구조 문제로 이어지는데 유언장도 이를 방지할 만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유언대용신탁을 대안으로 꼽기도 한다. 유언을 대신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신탁계약인데 생전에 본인의 뜻대로 승계자(수익자)를 지정할 수 있다. 피상속인이 살아 있을 때 재산을 맡기기 때문에 경영권 분쟁을 사전에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신격호 명예회장처럼 후견인 지정을 받더라도 신탁의 효력은 유효하다. 위탁자가 의사능력을 상실하거나 사망해도 신탁목적에 따른 재산관리는 지속되기 때문이다. 가업승계신탁도 있는데 경영자가 생전에 원하는 자녀 또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주식을 넘기는 방법이다.
다만 주요 그룹에서 신탁을 통한 상속과 승계가 이뤄진 적은 없다. 신탁이라 해서 유류분 제도를 피할 수 없는데다 신탁업자는 15%가 넘는 지분에 대한 의결권 행사가 금지돼 있다. 활용성이 크지 않은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재벌가 상속·증여에 대해선 세율은 60% 수준으로 강하게 규제하나 가업승계를 위한 제도는 미비한 상황"이라며 "대기업 상속 분쟁과 경영권 다툼 방지에 대해선 결국 유가족들의 합의에만 맡겨져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