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과 LG그룹은 우리나라 4대그룹 중 지주사 체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한 곳이다. 두 그룹에서 지주사의 역할은 완전히 다르다. LG그룹 지주사가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근거로 그룹 전반의 경영을 관리·감독하는 컨트롤타워라면 SK㈜는 '투자'에 방점이 찍힌 투자형 지주사로 기능하고 있다.
같은 지주사 체제를 채택했음에도 차이가 발생한 이유는 경영에 접근하는 두 그룹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보수적이지만 신중하고 안정적인 형태의 경영을 펼쳐온 LG그룹과 과감하고 어찌 보면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SK그룹간의 차이가 지주사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LG, 20여년간 이어진 컨트롤타워 역할 ㈜LG는 지주사 차원에서 별도 사업을 하지 않는 순수 지주회사다. 별도 사업은 하지 않고 자회사로부터 취득하는 배당수익·상표권 사용수익·임대수익으로 운영되고 있다. 자회사에 대한 관리·감독의 역할이 강조된 조직이라고 볼 수 있다. 재무·홍보·법무·인사에 더해 그룹의 주력 사업인 전자·화학·통신을 담당하는 임원을 두고 있는 점에서 이같은 기능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LG의 명분이 자회사들에 대한 지분에 있다는 점에 주목된다. LG전자·LG화학·LG유플러스·LG생활건강 등 주요 자회사에 대한 지분율이 30%를 넘어선다. 이를 근거로 자회사들의 경영상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구조인 셈이다.
'정도경영'과 '투명경영'을 앞세워온 LG그룹의 경영방식이 드러난 사안으로 해석된다. 지분에 의한 지배력이라는 합리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세워진 공식적인 컨트롤타워라는 점에서다. LG그룹 총수일가 일원들은 그간 정경유착과 같은 사회적 논란에 엮이지 않는 등 철칙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자칫 비선 조직으로 인식될 수 있는 별도 조직이 아닌 지주사를 컨트롤타워로 내세운 것도 투명성을 강조하기 위한 선택으로 분석된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사진)이 취임한 이후 ㈜LG에 경영전략부문과 경영지원부문이 신설되고 미래투자팀이 설립되는 등 세부적인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변화가 발생한 것은 아니다. 2003년 출범 이후 20여년간 그룹 경영을 선두에서 이끌어가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빠르게 구축해 놓은 지주사 중심 지배구조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던 만큼 지주사가 안정적으로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한다.
◇SK㈜, 수펙스추구협의회에 일부 역할 일임 LG그룹과 달리 SK그룹 지주사의 역할은 변화를 거듭했다. SK그룹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에 나섰던 2007년에만 해도 SK㈜는 그룹 경영 전반을 컨트롤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던 중 SK그룹은 2013년 수펙스추구협의회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고 지주사의 기능을 일부 이관했다. 계열사에 대한 자문 및 지원하는 기능 등이 그 대상으로, 지주사로서 계열사들을 관리·감독하는 역할을 이때 떼어내게 됐다. 지주사는 신성장 동력 발굴,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에 집중하도록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이 지주사 역할에 변화를 준 명분은 각 계열사의 경영 독립성 확대에 있었다. 지주사가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한다면 과거 구조조정본부가 있었던 시절과 결국 같아지는 셈이 되는 만큼 독립경영에 있어서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당시 SK그룹이 추진했던 지배구조 재편은 최 회장의 부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이뤄진 측면도 있다는 분석이다.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을 당시 최 회장은 배임·횡령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고 있었고, 세달 후 최 회장은 재판부로부터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출범한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SK㈜·SK이노베이션·SK스퀘어·SK E&S·SK하이닉스·SK텔레콤·SKC 등 20개 계열사가 소속돼있는 기구로 컨트롤타워가 아닌 의사협의기구를 지향한다. 하지만 그룹 내외부에서는 협의회 의장을 그룹 2인자로 보고 있다. 연말 임원인사를 통해 오너가 경영인인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으로 선임됐다. 실질적으로 SK그룹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한다는 인식 역시 지배적이다.
SK㈜는 최 회장이 앞서 언급한 방향대로 신성장 동력 발굴, 투자 포트폴리오 관리에 집중하게 됐다. SK㈜가 주목한 부분은 '투자'다. 장동현 부회장이 SK㈜ 의 대표이사를 맡았던 2017년부터는 SK㈜의 투자 기능이 강화됐다. SK그룹의 성장 원동력이 인수합병(M&A)에 있었던 만큼 지주사의 시선이 투자로 향하는 일이 당연했다는 것이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첨단소재·그린·바이오·디지털 4개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시세차익을 확보하고 신사업을 발굴한다는 목표였다. 연간 1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투자에 쏟아부었고 일부 성과도 있었다. SK팜테코 기업공개(IPO) 성공 및 글로벌 물류기업 ESR 지분 일부, 차량공유 업체 쏘카 지분 매각, 미국 차량공유 업체 투로 지분 매각 등을 통해 시세차익을 올리기도 했다.
사모펀드에 비견됐을 정도로 공격적으로 투자에 임해온 SK㈜의 기능이 또 한번 변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SK그룹은 최근 실시된 정기 임원인사 및 조직개편을 통해 SK㈜의 투자기능을 일부 축소하기로 결정했다. 정기 임원인사가 실시되기 전인 지난 10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서든데스' 위험성을 경고하며 일부 계열사의 투자 사례에 대해 직접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SK㈜는 최근 배포한 인사 보도자료를 통해 "지주회사 본연의 포트폴리오 관리 기능을 강화해 멤버사들의 기업가치 제고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