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점자(First Mover) 우위효과는 일반론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무패를 보장하진 않는다. 대표적 사례로 애플이 있다.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길 기다렸다가 한발 늦게 등장해 경쟁자를 앞질러왔다. 아이팟과 스마트폰, 태블릿이 모두 이런 케이스다.
이른바 '신속한 추격자(fast follower)'의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서 SK그룹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SK하이닉스가 그랬고 배터리소재로 사업을 확장 중인 SK머티리얼즈, 2차전지 후발주자인 SK온 역시 경쟁자를 무섭게 뒤쫓는 위치다.
그러나 추격이 무위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전력을 다한 스퍼트가 어느 시점 반드시 요구된다. SK하이닉스가 시장에서 성공적으로 자리잡기까지 감행했던 공격적 투자를 SK온에서 재현하고 있는 이유다.
SK하이닉스는 SK그룹에 편입되기 전만 해도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 인수 직전인 2011년 4분기 영업손실이 1675억원에 달했다. 반도체 불황, D램 가격 추락이 원인이었다. 회복은 SK그룹 품에 안기면서 시작됐다.
하이닉스는 이미 매각 시도가 두 차례나 실패한 상황이었다. 2009년 효성이 인수 의사를 보였다가 돌아섰고, 그해 말 재차 매각공고를 냈는데 마땅한 후보자 없이 썰렁했다. 하지만 2011년 6월 SK텔레콤이 인수의향서를 제출하면서 국면이 달라졌다. 당시 최태원 회장은 석유화학, 통신에 이은 제3의 성장동력이 필요했으며 그 역할을 반도체가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반대가 엄청났다. 하이닉스는 심각한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던 데다 성장 가능성도 의심받았다. D램 가격이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하는 등 업황이 어두웠다. 부정적 여론을 무릅쓰고 최 회장은 인수를 강행한다. 3조4000억원이라는 거금을 써서 하이닉스를 사들였다. 돌아보면 지금의 SK그룹을 만들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선택이다.
'SK'를 이름에 붙인 하이닉스는 2013년 바로 흑자전환했다. D램 시장이 호황을 맞기도 했으나 투자가 확대된 영향도 컸다. SK그룹은 하이닉스 M&A 과정에서 채권단 주식 매수와 함께 신주를 발행해 청주 M12 라인에 투자했고 미국 컨트롤러업체인 LAMD(지금의 SKHMS)를 2800억원에 인수하는 등 과감한 투자를 계속했다.
이는 하이닉스가 이미 불가피하게 택하고 있던 패스트 팔로워 전략을 가속화하는 효과를 냈다. 1980년대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은 미국과 일본이 주도했었다. 반도체산업은 기술집약적이고 수요 예측이 중요하기 때문에 높은 위험부담을 수반한다. 출발이 늦은 하이닉스, 삼성전자는 생산설비 확보와 신제품 개발 등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생존을 위해 경쟁사들을 빠르게 따라잡아야 했다. 하이닉스는 1990년대 초반 설비투자를 아꼈던 일본업체들과 달리 투자액을 늘렸고 2005년, 2006년에도 경쟁회사들과 반대로 투자규모를 올려잡았다. SK그룹 편입은 앞선 투자의 후유증을 치유했을 뿐 아니라 다시 달릴 여력을 심어준 전환점이 됐던 셈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SK의 하이닉스 인수는 2000년대 최고의 딜 중 하나로 불린다. 현재 메모리반도체 보릿고개가 왔지만 반등이 머지 않았다는 관측이 고개를 들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버 관련 시장이 수요 개선을 이끌 동력으로 꼽힌다. SK온의 공격적 투자를 부정적으로 보기 힘든 배경에도 SK하이닉스의 성공이 있다.
SK온은 2017년에 와서야 이차전지 사업을 본격화했다. 국내외 경쟁사들과 비교해 한참은 뒤처졌다. 그러나 확장세를 보면 가장 위협적이다. 2022년 말 기준 SK온의 생산능력은 71.7기가와트시(GWh)를 기록했다. 전년보다 3배 이상, 3년 전과 비교해 15배 가까이 늘었다. 일각에선 무리한 투자를 걱정하지만 SK 일가의 승부사적 기질이 돋보이는 시점이기도 하다.
오너의 강력한 의지 역시 SK온을 뒷받침하고 있다. 최재원 수석부회장은 SK온을 2030년 세계 1위에 올리겠다는 다짐을 지난해 내걸었다. SK온이 반년간 실탄 8조원을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시장의 기대가 그와 크게 어긋나지 않음을 짐작케 한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이제 전력 질주만 남았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