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그룹이 지난해 르노그룹을 제치고 글로벌 판매량 3위에 올랐다. 2010년 포드를 제치고 글로벌 5위에 오른 지 12년 만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2018년 수석 부회장을 거쳐 2020년 회장으로 취임한지 2년만에 이룬 성과다.
하지만 단순히 이걸로 정 회장을 평가하는건 아쉬움이 남는다. 엄밀히 말하면 판매량 순위는 아버지인 정몽구 명예회장의 레거시를 물려받은 측면이 크다.
정 회장을 꾸미는 수식어는 고루하기 그지 없다. '소탈, 노력, 겸손, 예의' 등이 대표적이다. TV 속 세련되고, 기품이 넘치며, 후광이 빛나는 재벌 후계자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소박함과 건실함은 바로 현대가의 힘이다.
자칫 소박함과 건실함은 올드한 것으로 보여진다. 겉으로 보기에 정주영과 정몽구는 고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500원 거북선 지폐로 차관을 받아 조선소를 지은 정주영은 당시 기준으로는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전기차와 수소차를 화두로 던진 정몽구도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혁신가였다. 그런 혁신가의 자질이 정의선에게 이어지고 있다고 말하는건 과한걸까.
전기차는 물론이고 미래항공모빌리티(AAM), 로보틱스, MoT(모든 사물에 이동성을 부여) 생태계 구축 등 미래 모빌리티를 위한 구상을 착착 실행하고 있는 정의선은 다분히 미래 지향적이다.
정 회장이 수장이 된 이후 그룹 문화도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올드한 형님들이 가득할 거 같은 양재동 본사는 마치 벤처기업들이 몰려 있는 테헤란로나 판교 테크노밸리를 옮겨 놓은 것 같다.
직원들은 정장 대신 입고 싶은 옷을 입는다. 반바지에 스니커즈는 유별나지도 않다. 오랫동안 한 테이블에 여럿이 앉아 회의를 하거나, 업무를 보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출퇴근 및 점심시간 유연화로 인해 혼자 한쪽 테이블에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노트북을 펼쳐 놓고 자유롭게 업무를 보는 직원들도 눈에 띈다.
순혈을 중시하던 인사 기조도 정 회장 전과 후로 극명하게 나뉜다. 피터 슈라이어를 시작으로 영입되기 시작한 푸른 눈의 외국인은 이제 이슈가 되지도 않는다. 미래 사업을 위해 외부 전무가를 영입, 사장을 맡기는 파격도 거침없다. 30~40대의 임원들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폼잡는 스타일도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유독 인플루언서형 재벌 오너들이 많다. 비즈니스보다 SNS에 집착하면서 그것을 소통이라고 주장한다. 정 회장은 그런 점에서 '비즈니스맨'에 가장 가까운 오너라는 평이다. 거침없는 투자와 탁월한 실적으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영인으로서 추진력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 회사 안팎의 평가다.
정 회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인물들은 "사업 포착 능력이 탁월하다"고 평가한다. 정의선의 '디자인 경영'이 대표적이다. 깡통차와 같은 현대기아차의 이미지는 이를 기점으로 완벽하게 바뀌게 된다.
또하나의 사례. 수도 이전을 앞둔 인도네시아와 AAM 생태계 구축에 나선건 미래 사업 확대를 위한 일종의 테스트 베드다. 실제 도시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AAM의 가능성을 확인하려는게 정 회장의 생각이다.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의 공식 의전용 차량으로 G80 전기차를 납품한 것도 정 회장의 사업가적 기질이 돋보이는 경우다. 각국 정상들이 경험한 G80 전기차의 만족감은 상상 이상이었다고 한다.
일론 머스크와 제프 베이조스로부터 테슬라와 아마존을 보듯 현대차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정 회장의 작품이다. 앞으로도 정 회장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레거시에 머물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헤쳐나갈 것이다.
정의선이 꿈꾸는 미래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 경제나 시장에 행운이 아닐까. 조용히 현대차의 리부트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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