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SK지오센트릭은 튼튼한 기초체력(펀더멘털)으로 시장 안팎의 주목을 받았다. 국내 최대의 범용 석유화학 제품 생산능력을 보유한 데다 미국 다우케미칼, 프랑스 아르케마 등을 잇달아 인수합병(M&A)하며 몸집까지 빠르게 불리면서다.
나경수 사장이 '딥 체인지(근원적 변화)'를 언급할 수 있었던 든든한 배경이었다. 2년 전 그는 친환경 영역에 약 5조원을 쏟아부어 2025년까지 자사의 성장 포트폴리오를 석유화학 중심에서 친환경 화학 소재로 바꿔나가겠다는 청사진을 공개했다.
하지만 지난해 석유화학 업계에 보릿고개가 찾아온 뒤부터 회사는 걱정이 늘었다.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현금 창출력까지 떨어지면서 부담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위기의 시대, SK지오센트릭도 자금관리 업무를 강귀은 재무실장에게 새로 맡기며 재정비에 나섰다.
◇'5조원 투자', 그때는 쉽고 지금은 어렵다? SK지오센트릭은 2020년대 들어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시작했다. 이전까진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에 그쳤지만 폐(廢) 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에 뛰어들어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친환경 제품까지 생산해 내겠다는 계획이었다.
구체적으로 SK지오센트릭은 향후 2025년까지 기존 플라스틱 생산 규모인 90만t(톤)에 해당하는 폐플라스틱 처리 설비를 구축할 예정이다. 친환경 소재 및 원료의 생산·도입도 늘려나간다. 이를 위해 회사는 현재 '5조원'의 대규모 투자계획을 세운 상태다.
그러나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은 모습이다. 현재 석유화학 업계는 금리 인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장기화 등으로 이례적인 불황을 겪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석유화학 제품 수요가 둔화하면서 최근 들어 회사의 실적도 주춤하는 모습이다.
SK지오센트릭의 지난해 3분기 연결 기준 상각전영업이익(EBITDA)은 3080억원이다. 이는 전년 같은 기간 EBITDA(5154억원)에 비해 2000억원이나 낮아진 수준이다. 대규모 현금이 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회사가 예전만큼 돈을 잘 벌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상황에서 투자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현재 SK지오센트릭이 발표한 계획은 울산에 6만6000t 규모의 폐플라스틱을 처리할 수 있는 열분해 공장 건설 작업과 미국 퓨어사이클사에 680억원 지분투자 및 합작법인 설립 등이다. 이외 투자계획은 아직 미확정이다.
◇강귀은 신임 재무실장, CFO의 무게 이겨낼까SK지오센트릭에는 공식적으로 최고재무책임자(CFO) 직함이 없다. 그러나 회사의 재무를 총괄하는 인물로는 강귀은 재무실장이 꼽힌다. 1977년생인 강 실장은 SK이노베이션 자금팀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이달부터 SK지오센트릭 재무실장을 역임하고 있다.
중장기 투자 계획을 이끌어 온 김정수 실장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김 실장은 SK이노베이션 재무부문 재무1담당을 맡아 SK지오센트릭의 파이낸스토리 설계부터 모회사의 회계 전반 업무까지 가꿔온 인물로 꼽힌다. 지금은 재무2담당으로 옮겼다.
재무수장의 얼굴이 바뀌는 사이 회사의 지위도 달라졌다. 2021년 SK이노베이션 영업이익에서 SK지오센트릭이 차지하던 비중은 10%가 넘었다. 그러나 지금은 3% 수준이다. 모회사 아래에서 신사업 밑그림을 자신 있게 그리던 때가 더 이상 아니라는 의미다.
신임 재무실장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올해 현금창출력이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지만 글로벌 경기침체라는 불확실성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신사업 투자, SK이노베이션에 대한 배당급 지급 등 대규모 자금 유출은 예정된 수순이다.
일단 강 실장은 회사채 발행으로 첫행보를 시작했다. 차입금 상환과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 투자 목적으로 회사채 3000억원어치를 발행했다. 투자활동이 커지는 상황에서 선제적으로 자금을 마련해 지출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해석된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김정수 실장은 SK에너지·SK트레이딩인터내셔널 재무실장으로 자리를 이동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