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사가 주도하던 국내 장기 기업어음(CP) 시장에 일반기업이 대거 뛰어들고 있다. 변동성 확대에 회사채 발행 시장이 냉각되자 자금 조달이 다급해진 기업들이 대안으로 장기CP를 택하고 있다.
장기CP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증권신고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이 사실상 '편법'인 전매제한을 걸어 사모형태로 발행하고 있다. 이 경우 정보의 비대칭성과 투명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발행 정보에 접근이 제한되면서 투자자 보호에 허점이 생긴다는 지적의 목소리도 나온다.
◇'조달 편의성에 저렴한 비용까지'…맛들린 장기CP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SEIBro)에 따르면 올 1~4월 일반기업이 장기CP를 발행한 곳은 총 9곳이다. 연초 롯데글로벌로지스를 시작으로 가장 최근 DL건설까지 발행금액은 총 8400억원이다. 발행사 수는 전년과 동일하지만 발행 규모는 12.7% 늘어났다.
롯데는 카드사와 캐피탈사 등 여전사를 제외하고도 그룹 차원에서 발행이 이어지며 눈길을 끌고 있다. 롯데지주, 롯데렌탈 등은 케이씨씨와 함께 지난해부터 2년 연속 발행을 이어왔다. 올해 발행된 일반기업 장기CP 가운데 70%가 롯데그룹일 정도다.
일반기업들이 회사채 대신 장기CP에 집중하는 것은 회사채 조달이 어려워지면서다. 기준 금리 인상으로 채권평가손익이 악화된데다 조달 비용이 오르며 회사채 메리트가 떨어졌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크레딧이 강등되거나 하향압박을 받는 기업을 중심으로 이러한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장기CP의 경우 증권신고서 제출 외에는 수요예측 의무가 면제된다. 여기에 회사채 신용등급에 비해 기준이 완화된 단기신용등급을 받아 발행하는 만큼 조달 편의성이 높다. 회사채의 경우 공모로 발행할 때마다 본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장기CP의 경우 등급 유효기간 안에는 추가적인 평가의 번거로움을 덜 수 있다.
회사채의 경우 AAA~D까지 총 20개 등급으로 구분된다. 이에 반해 CP는 A1~D까지 12개 등급으로 구성되며 회사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세분화돼 있다. 특히 단기신용등급으로 장기물을 발행하는 데다 회사채 민평금리를 기반으로 발행한다. 하지만 장기CP는 회사채가 아닌 만큼 금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장단기금리 왜곡의 주범으로 꼽힌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채권 발행이 여의치 않아 장기CP를 발행한다고 보면 된다"며 "채권 발행이 쉬운데 굳이 CP 만기를 길게 늘릴 유인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발행 코스트가 적은 쪽으로 결정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투자자들는 장기CP가 장부가로 평가된다는 점에서도 회사채보다 유리하다. 채권의 경우 평가손익이 즉각적으로 재무에 반영된다. 이에 반해 장기CP의 경우 발행금리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데다 민감한 재무상태를 다소 감출 수 있다는 점도 강력한 발행 유인으로 작용한다.
◇전매제한으로 '꼼수'…증권신고서 패스로 발행정보 '깜깜'
장기CP를 활용해 자금을 조달하는 일반기업은 대부분 낮은 재무건전성을 갖고 있다. 가뜩이나 미매각이 속출하는 가운데 코로나19에 따른 경영악화 등으로 크레딧이 강등되면서 회사채 발행에 선뜻 나서기도 힘든 상황이다.
문제는 낮은 재무건전성으로 예기치 못한 충격에 재무상태가 빠르게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롯데로지스틱스의 경우 지난해말 기준 부채비율은 322.8%로 전년 대비 32.4%포인트 높아졌다. 차입금의존도 역시 61.7%로 꾸준히 늘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업은 일종의 '편법'을 사용해 증권신고서 제출 의무를 면제받고 있다. 장기CP는 경제적 실질이 회사채와 동일해 2013년부터 증권신고서 제출이 의무화 됐다. 하지만 위탁자가 50인 이상 되지 않도록 장치를 마련하거나 보호예수 1년을 취할 경우 전매제한 조치로 인정돼 신고 의무가 면제된다.
올들어서만 롯데글로벌로지스, 롯데알미늄, NS쇼핑, DL건설 등이 이러한 방식을 통해 장기CP를 발행했다. NS쇼핑의 경우 공모채 수요예측에서 대량 미매각이 발행하자 곧바로 장기CP를 통해 추가 조달에 나섰다.
장기CP를 이처럼 사모형태로 발행할 경우 발행 정보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면서 우려를 낳고 있다. 증권신고서를 미제출시 사업, 회사의 위험 등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장기CP는 할인채 방식으로 발행당시 이자를 뺀 금액을 조달하는 만큼 이자 상환 적기성을 통한 회사의 재무건전성을 파악하도록 하는 순기능이 사라지게 된다. 투자자 보호에 허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셈이다.
CP 시장 자체가 애초에 단기물 시장인 만큼 한두번 시범 발행은 가능하지만 재무상태가 좋지 않은 기업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 자본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CP는 기본적으로 크레딧이 낮은 발행사들은 들어 올 수 없는 시장인데 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회사채를 발행하던 기업들이 편리함을 추구하기 위해 CP로 발행 전략을 수정할 가능성이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