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감정이 들었나.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기자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그런 감정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상상하지 못해본 시나리오가 펼쳐졌으니 '당혹감'이라는 말도 설명하기 충분치 않았던 감정을 그때 느꼈다.
계엄 사태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올해 우리 재계와 자본시장에서도 이해관계자라면 비슷한 당혹감을 가질 수 있었던 사건들이 더러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두산 사태가 떠오른다. 두산밥캣 주주였던 테톤캐피탈은 두산밥캣-두산로보틱스 간 합병 소식에 본인들이 보유한 주식이 휴지조각이 될 판이라며 공개적으로 '작심 발언'을 했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대주주의 잇속이 최우선순위인 작업이라는 점을 통감했던 그들에게 합병 소식은 '계엄'급 충격이 아니었을까.
고려아연도 올해 핫한 이슈였다. 영풍과의 분쟁 과정에서 자기주식을 끌어모았다. '주가안정과 기업가치 제고 및 주주 권익 보호'라는 명분에 2조원이 넘는 자기주식을 취득하기로 했다. 빚내서 산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주주 권익 상승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여기까지는 큰 문제가 안됐다. 그런데 곧바로 유상증자를 결정했다. 다양한 투자자가 주주로 참여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해할 수 없는 명분을 걸쳤다. 수많은 비판에 직면하면서 고려아연은 결국 의사결정을 철회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 번 고민해봐야 한다. 두산과 고려아연 사례는 외국인으로 하여금 '한국 주식을 사는 것은 바보 짓'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이런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기업이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니라고 본다. 비판을 감수하고라도 이득이, 정확하게는 오너들에게 돌아갈 이익이 더 클 것이니 정면돌파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적어도 주주 설득에 성공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보 홍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주주들은 더 이상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이런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다. 오너 한 마디의 무게가 크다지만 어쨌든 결정의 주체는 이사회다. 기업의 이사회가 오너 말 한마디에 껌뻑 죽는 이사회인가, 혹은 오너가 아닌 주주일반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사회인가. 앞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할 수 있는 핵심적인 요소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여러 이해관계자가 얽혀있는 집단의 의사결정자는 당연하게도 일반·대중의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마땅하다. 그러려면 의사결정자는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이고 감내할 것은 감내해야 한다. 올해는 정계나 재계나 그게 안됐다. 내년에는 정·재계와 자본시장에 상상 밖의 '계엄급 충격'이 없기를 바란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