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모 대학 A 교수를 만났다. 회계학 분야 권위자 중 한 명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최근 20여 년간 내로라하는 대기업 소속 사외이사로 활약해 온 인물이다. A 교수와 직접 만나 얘기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로 소개하려고 했지만 사외이사 이력이 담기는 게 불편하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바람에 익명을 빌어 이제야 소개한다.
A 교수를 만난 건 B 교수 덕분이다. 사외이사 경력을 쌓고 있는 B 교수는 A 교수가 자신의 멘토라고 소개했다. 20여 년간 시중은행과 증권사, 제조기업, 통신사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대여섯 곳에서 사외이사로 일해온 A 교수는 기간도 기간이지만 그간 달성한 업적이 많다고 했다. 업적이라는 게 뭘까, 궁금해하며 A 교수를 찾았다.
50대 후반의 A 교수는 그간의 사외이사 경력을 '축복받은 커리어'라고 소개했다. 사외이사로 일한 기업들이 모두 '주인 없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의사결정의 키를 쥔 오너가 없다 보니 이사회 역할이 중요했고 사외이사 발언권도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시중은행 사외이사로 일했을 때다. 20여 년전 미국에서 회계부정 피해가 발생하자 회계제도 개혁 필요성이 대두됐고 기업 거버넌스의 대대적인 변혁을 초래한 사베인스 옥슬리(SOX)법이 통과됐다.
A 교수는 감사위원회 기능을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는데 주력했다. 내부감사 제도를 손봤고 사외이사 토론을 거쳐 경영 현안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외부감사 결과에 대한 사내외 입체적 평가 시스템도 구축했다. 경영진에 조언을 제공하면서 감시와 견제 역할에 충실하는 게 사외이사 역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이사회 선진 모델을 국내에 이식했다는 건 학자로서도 보람된 일이다. 임기를 마칠 때 즈음 "다른 기업에서 이곳에서 하신 것의 반의반만 해도 대단하신 겁니다"라는 평가를 들었다. A 교수는 주변 추천을 받아 다른 기업으로 옮겼고 그곳에서도 성과를 내 다른 기업에 영입되기를 반복, 그렇게 사외이사 커리어 20여년이 쌓였다.
A 교수는 문득 오너기업에서 일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오너 경영인이 이사회를 이끌거나 사외이사 선임에 관여하는 곳이 적지 않다. A 교수는 "이사회에 실질적 권한이 주어지는 게 중요한데, 여기에 필요한 제도는 모두 갖춰져 있다"면서 "결국 제도보다는 운영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너 기업이라도 현행 제도가 요구하는 적정 권한을 이사회에 부여하면 그만큼 열심히 일하는 이사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얘기다.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믿느냐에 대한 문제. A 교수는 "모든 기업에 같은 잣대를 들이 내밀 수 없다"면서도 "우리나라 자본시장 발전 수준에 맞춰 인식 수준을 조금씩 높여가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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