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 국내 정유 산업은 그야말로 맨땅에서 시작됐다. 석탄이 주요 에너지공급 수단이었던 1950~1960년대 우리나라는 원유를 수입해 휘발유 등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를 벗어나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석유산업의 육성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지난해 세계 73개국에 휘발유와 경유 등 석유제품을 수출하는 국가로 올라섰다. 품질·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아시아를 넘어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뻗은 우리나라는 전 세계 물량의 3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휘발유·경유·항공유를 만들어 수출하는 석유제품 강국이 된 것이다.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선봉에는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에쓰오일, 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자리 잡고 있다. 다만 같은 종착지에 있더라도 이를 이뤄내기까지의 과정은 상이했다.
◇SK이노베이션 뿌리는 '유공', 국내 최초 정유사
SK이노베이션의 뿌리는 1962년 국내 최초 정유사로 탄생한 유공이다. 한국전쟁 직후 정부가 첫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설립됐다. 1963년 울산정유공장을 완공한 유공은 다음 해 정상가동에 들어가 석유제품 생산을 시작했다.
유공은 독점 정유업체였으나 1970년 6월 미국의 걸프사가 지분 50%를 인수해 경영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위기에 걸프사는 1980년 8월 보유주식을 모두 정부에 인도하고 한국에서 전면 철수했다.
정부는 유공의 민영화를 결정했다. 연이은 석유위기에 경영권 이전의 최우선 조건은 원유의 장기 안정적 확보 능력에 뒀다. 이때 정부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의 각별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최종현 선경(현 SK) 선대회장에 높은 점수를 줘 유공의 경영권을 선경에 넘겨줬다.
최 선대회장은 1982년에 선경의 상호를 ㈜유공으로 변경하고 1985년 대한석유의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해서 선경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전환시켰다. 이후 1997년 사명을 SK로 변경했다.
1998년부터 그룹을 이끌게 된 최태원 회장은 지속 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딥체인지’라는 경영 철학을 내세웠다. 딥체인지는 근본적이고 깊이 있는 변화를 추구하자는 SK그룹의 성장 이념이다. 사명도 2008년 SK에너지로 바꾸며 에너지 사업에 진심을 보였다.
SK이노베이션은 최 회장의 '해외 유전 개발사업' 뚝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2007년 베트남에 이어 2008년 콜롬비아, 2010년 페루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를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특히 페루 LNG 프로젝트에서는 유전개발에서 가스생산, 수송, 수출을 망라하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이후 2012년 혁신과 변화 지향, 미래 성장에 의미를 둔 SK이노베이션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GS칼텍스의 전신 호남정유, 제2정유사업자 선정
1966년 5월 8일. 정부의 '제2정유공장 건설 및 경영희망자 공모'가 올라오면서 민간주도의 제2정유공장건설이 수면 위로 부상했다. 당시 정유산업에 대한 재계의 관심은 대단했다. 1964년부터 가동을 시작한 대한석유공사(유공)의 연간 순이익이 30억원에 달하면서 제2정유공장 허가를 받을 시 재계 내 판도가 뒤바뀔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허만정 GS그룹 창업주도 제2정유사업자 선정 경쟁에 참여했다. 당시 구 창업주는 락희화학공업사를 운영했으며, 사돈지간인 허 창업주는 창업 자금을 지원하면서 경영에 일조했다.
락희화학공업사는 미국의 석유회사 쉐브론의 자회사 칼텍스와 각각 50%씩 출자하는 협작형식을 채택해 정부에 사업자선정 신청서를 냈다. 1977년 제2정유사업자에 선정되며 설립된 '호남정유'가 GS칼텍스의 전신이다.
호남정유가 1967년 민간 정유사로 출발한 후 한화와 쌍용(현 에쓰오일) 등이 국내 석유 시장에 뛰어들었다. 기존에 유공(현 SK에너지)과 극동정유(현 현대오일뱅크)를 비롯한 경쟁 체제는 1980년대 비로소 완성됐다.
1981년 2차 석유파동은 호남정유에 큰 기회였다.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호남정유는 모회사인 쉐브론의 국제신용 덕분에 원유를 수월하게 확보해 경쟁사보다 원자재값을 낮출 수 있었다.
호남정유는 이때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유휴 정제시설을 활용한 임가공 수출을 시작했다. 임가공 수출은 원유를 위탁받아 정제처리한 후 수출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 1983년 2억 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우리나라가 석유 수출국으로 변모하는 출발점이었다.
호남정유는 1996년 LG칼텍스 정유로 사명을 바꾼 뒤 2005년 1월 LG그룹 내 유통·에너지·서비스사업 등 14개 사가 GS그룹으로 계열분리를 단행하면서 지금의 GS칼텍스가 됐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쌍용…외국계로 변한 '에쓰오일'
에쓰오일은 쌍용양회와 이란국영석유공사(NICO)가 1976년 함께 설립한 한이석유가 전신이다. 국내 정유 4사 중 출발이 가장 늦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국내에서 중동 업체와 처음으로 합작해 만든 정유사인 부분이다.
하지만 1980년 NICO가 자본을 철수하면서 쌍용양회가 모든 지분을 인수해 쌍용정유로 변화했다. 이후 온산 윤활유공장, 인천 저유소 등을 준공하며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쌍용그룹은 지속된 경영난에 1990년대 아람코 자회사 AOC에 지분을 넘기며 분리됐다. 이후 사명은 2000년부터 에쓰오일로 변경됐다. 아람코 출신이 2003년부터 최고경영자(CEO)를 맡기 시작했다.
에쓰오일은 과감한 투자로 국내 정유업 고도화 시대를 열었다. 1조원을 들여 벙커C유 크래킹센터(BCC)를 완공하면서다. 경쟁사들보다 10년 이상 먼저 중질유를 재처리하는 고도화 시설을 갖췄다는 평이다.
에쓰오일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투자를 줄이는 분위기에도 연구개발(R&D) 강화에 힘썼다. 과감한 투자로 미래를 준비하며 후발주자의 단점을 상쇄하기 위해서다. 에쓰오일은 서울 마곡산업단지에 약 3만m² 용지를 확보해 연구개발(R&D) 강화를 위해 첨단연구소 건립했다.
에쓰오일 투자는 현재진행형이다. 2022년 최종 투자 승인을 얻어 국내 석유화학 역사상 최대 규모 프로젝트인 '샤힌 프로젝트'에 9조2580억원을 투자해 추진 중에 있다. 주요 시설로는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에틸렌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규모 스팀 크래커가 있다. 에틸렌 연간 생산량 기준으로 그 규모가 180만t에 달할 예정이다.
◇'윤활유 원조' 극동정유, 파란만장한 60년 역사
현대오일뱅크는 윤활유를 판매하던 극동정유가 전신이다. 장홍식 창업주가 1964년 설립한 극동정유는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이했다. 당시 기계화를 통한 산업화에 윤활유 수요는 매년 급증했고, 윤활유 업체들이 늘어 신사업으로 석유정제업을 낙점했다.
극동정유는 1968년 네덜란드 석유회사 로열더치쉘과 합작투자 해 고급윤활유 배합공장을 세웠다. 사명도 극동쉘석유로 바꾸며 변화를 꾀했다. 1973년에는 극동쉘판매를 설립해 제품 생산과 판매를 분리 경영하기 시작했다. 1977년 로열더치쉘이 철수를 결정하며 현대그룹과 연을 맺게 된다.
현대그룹은 쉘이 가지고 있는 극동정유 지분 50%를 인수했다. 극동정유는 1980년대 들어서는 정유업계 최초로 천연가스(LNG)를 공급했다. 또 1989년 55만평 부지의 대산공장을 세워 하루 6만 배럴의 원유를 정제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하지만 2차 석유파동으로 재정난이 지속되는 등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현대그룹은 1993년 7월 현대중공업을 통해 극동정유 지분 35.88%를 추가 확보해 극동정유의 경영권을 인수했다. 사명도 현대정유로 변경했다. 다만 수익성 회복은 이뤄지지 않은 채 IMF 외환위기까지 직면하면서 결국 IPIC(아랍에미리트 국영석유투자회사)에 신주 발행 방식으로 지분 50%를 양도, 2000년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현대정유는 IPIC로 넘어간 후에도 꾸준히 사업 확장에 힘썼다. 특히 정주영 회장의 조카인 정몽혁이 사장 자리에 올라 국내 최초의 주유소 브랜드인 오일뱅크를 론칭했다. 정 사장은 1999년 한화에너지까지 인수해 주유소를 1000개까지 늘리며 업계 3위로 성장했다. 이후 현대정유는 2002년 현대오일뱅크로 사명을 변경한다.
현대정유는 현대그룹이 잃었다가 결국 '다시 찾아온' 회사다. 현대그룹이 2008년 IPIC가 수익에 대한 배당을 지급하지 않은 부분을 지적하며 국제형사재판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재판을 신청을 하면서다. 당시 IPIC는 계약위반을 인정했고, 2010년 지분 70%를 현대중공업에 매각했다. 현대중공업은 현대오일뱅크 지분 91.13%를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가져왔다.
현대오일뱅크의 초대 사장은 현대중공업 부사장인 권오갑 사장으로 임명됐다. 권 사장은 석유화학을 비롯해 윤활유, 카본블랙, 오일 터미널 등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회사의 성장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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