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한솔그룹과 무림그룹은 모두 오너십이 곧 리더십인 곳이다. 한솔그룹은 범 삼성가에서 독립한 이인희 고문으로 출발해 조성민 부사장까지 직계들이 회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무림그룹 역시 이무일 회장부터 3세대 장손인 이도균 사장까지 굳건한 오너십을 유지하는 중이다.
3세대 경영인들이 전면에 나서기까지 그룹의 영토 확장과 개편이 이뤄지며 지배구조도 변화해 왔다. 한솔그룹과 무림그룹은 지주사인 한솔홀딩스와 무림SP를 활용하는 한편 오너일가의 계열사 지분 등으로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다.
◇삼남·차남이 물려받은 경영권, '가업승계' 의지가 관건
한솔그룹과 무림그룹의 공통점이자 독특한 점은 2세 승계를 장남이 아닌 삼남, 차남이 했다는 점이다. 현재까지도 장자승계 원칙이 공고한 재계에서는 드문 일이다. 사업 확장기에 형제들이 집어든 카드가 달랐기 때문이다.
한솔그룹은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뒤 금융과 정보통신, 제지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장남인 조동혁 한솔그룹 명예회장이 금융을, 차남인 조동만 전 한솔그룹 부회장이 정보통신 부문을,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이 제지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때 '018' 휴대전화 식별번호로 잘나갔던 한솔그룹이 PCS사업을 매각하면서 다시 제지업 중심으로 정비했고 삼남인 조동길 회장이 후계자로 떠오르게 됐다.
조동길 회장은 2001년 말 인사로 2002년부터 한솔그룹 회장에 올랐다. 조 명예회장이 이 시기 퇴진했고 조동만 전 부회장은 정보통신 기업들을 분리해 독립했다.
무림그룹을 차남이 맡은 이유는 영화 때문이다. 이동익 전 피카디리픽쳐스 대표가 이무일 창업회장의 장남이다. 이 창업회장의 일화를 보면 이해가 간다. 이 창업회장도 꽤 오랜 기간 방송과 영화 사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1955년 옛 대구극장 인수에 이어 1973년 대구 기반의 옛 FM라디오 방송국인 'BBC'를 사들이기도 했다. 두 사업 모두 잘 안됐지만, 예술인의 피가 선친부터 이어져왔다는 의미다.
무림그룹은 1984년 삼성제지(세림제지)를 매수한다. 제지 주요 계열사 3사인 무림제지(현 무림SP), 신무림제지(무림페이퍼), 세림제지(세하㈜) 체제가 구축됐다. 이동욱 회장이 무림제지와 신무림제지를, 이동윤 전 회장이 세림제지를 이어 받은 뒤 독립한다. 결과적으로 차남 이동욱 회장이 무림그룹을 맡게 됐다. 27세에 무림SP에 입사한 뒤 1980년 32세의 나이로 사장에 취임한다. 창업회장이 별세하며 1989년 6월 회장에 오른다.
◇'한솔홀딩스·무림SP' 지주사 체제 구축
두 회장들도 계열사의 확대와 정비를 통해 그룹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애를 썼다. 계열사가 늘며 그룹의 덩치는 커졌지만 오너일가의 지배력이 희석되는 리스크도 감내해야 했다. 많은 기업들이 이 난계를 해소하기 위해 지주사를 앞세우고 오너일가의 지주사 지배력을 통해 전체 그룹에 영향력을 미치는 방법을 택한다. 한솔과 무림도 그랬다.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의 주요 업적으로는 지주사 체제 전환 등이 꼽힌다. 계열사들의 변화가 잦았고 오너일가의 지배력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조 회장은 2015년 한솔제지를 투자와 사업 부문으로 물적분할하는 한편 한솔홀딩스를 지주사로 세웠다. 한솔홀딩스와 한솔제지의 주식교환 끝에 조 회장이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한솔그룹은 한솔홀딩스 산하에 한솔제지와 한솔홈데코, 한솔PNS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한솔홀딩스의 최대주주는 9월 말 기준 조동길 회장(17.23%), 조성민 부사장(3.00%)을 포함한 특수관계인으로 32.52%를 보유하고 있다. 다만 한솔홀딩스만 해도 소액주주 비율이 64.82%에 이르는 등 옅은 지배력이 약점으로 꼽힌다. 조 부회장이 2021년 임원에 오른 뒤 부지런히 장내 매입에 나섰지만 지주사 지분율이 3%다.
무림그룹의 이동욱 회장은 생산벨트 구축을 이룬 장본인이다. 세 개의 생산 벨트를 중심으로 계열사가 짜여 있다. 무림그룹은 지주사인 무림SP가 무림페이퍼와 무림P&P 등을 각각 자회사·손자회사로 두고 있다. 비상장사인 무림캐피탈·무림파워텍·대승케미칼·무림로지텍도 보유 중이다.
무림SP는 이도균 사장과 이동욱 회장, 이동근 전 중앙대 소아과 교수(숙부) 보유분을 합한 특수관계인 지분이 61.41%에 이른다. 이중 이도균 사장의 지분이 21.37%로 3세의 지배력도 공고하다. 무림페이퍼도 무림SP가 19.65%를, 이 회장 18.93%, 이 사장 12.31%, 그외 친인척 세 사람이 3.17%를 보유 중이다. 비상장사들은 지분의 9할 이상을 오너일가나 지주사가 갖고 있다.
◇'유학파' 3세들, 친환경 잰걸음
재계의 3세들은 앞선 세대의 경영자들과는 또 다르다. 한솔그룹처럼 애초부터 뿌리가 재계인 기업도 있지만 2세대가 성장했던 시대 등을 돌아보면 국내에서 이뤄진 후계자 교육과 선대 회장을 보좌한 어깨너머 경험이 병행됐다. 3세대는 날때부터 후계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3세대 경영인들은 오너일가이면서도 전문 경영인이자 국제통으로 길러지는 경우가 많다.
무림그룹의 3세인 이도균 사장과 한솔그룹의 3세인 조성민 부사장도 마찬가지다. 이도균 사장이 1978년생, 조 부사장이 1988년생으로 3040대 젊은 경영인이다. 모두 해외 유학파 출신이다. 이 사장이 미국 뉴욕대학교 경영학을, 조 부사장이 프린스턴대학교 경제학을 졸업했다.
이 사장과 조 부사장은 이미 두 그룹의 총수이거나 그 직전 단계에 와 있다. 20대 후반의 나이로 일찌감치 그룹 요직에 합류해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 사장은 2007년 영업본부 입사를 시작으로 제지사업본부와 전략기획실 등을 거쳤다. 무림 P&P의 울산 일관화공장을 짓던 2010년에 현장 경험도 쌓았다. 조 부사장은 대학 졸업 후 애널리스트를 거쳐 2016년 한솔홀딩스에 몸담게 됐다. 2019년 한솔제지로 적을 옮겼다.
이 사장은 이미 무림그룹을 이끌고 있다는 평가다. 최고위 직함은 이동욱 회장이 유지하고 있지만 이 사장이 실질적인 경영에 나서고 있다. 조 부사장은 2021년 상무로 승진해 임원이 됐다. 이달 한솔홀딩스 사업지원팀장(부사장)으로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직행했다. 고속 승진으로 3세 경영이 본격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차세대 경영인인 만큼 새 먹거리 발굴과 성장에 주력하고 있다. 이 사장은 펄프몰드 사업에, 조 부사장은 친환경 소재에 집중해 왔다. 이 사장은 친환경 종이 브랜드와 펄프를 활용한 펄프몰드 등을 주력 상품으로 내세우고 있다. 조 부사장은 직전 직책이 친환경사업담당 상무였다. 친환경 포장재 등이 주요 상품이고 조 부사장이 이를 이끌어 왔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