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같은 산업군에 속하면서도 경쟁없이 잘 공존하는 관계의 기업도 더러 있다. 카테고리만 공유할 뿐 포트폴리오가 다를 경우다. 한솔그룹과 무림그룹도 1990년대 전까지는 각자의 영토에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한솔그룹은 신문용지 등 인쇄용지의 강자였고 무림그룹은 백상지 등 산업용지 시장을 맡아왔다.
1990년대 이후 한솔그룹의 선전포고와 고급용지 수요 확대 등 시대의 변화로 변곡점을 맞게 된다. 평행선을 달리던 포트폴리오에 교차점이 생기며 경쟁이 시작됐다. 신문용지와 산업용지의 양대산맥을 구축했던 한솔과 무림은 인쇄·산업용지를 넘어 특수지와 포장용 골판지 등 다양한 종이 시장에서 격돌하고 있다.
◇한솔, 이인희 고문이 꿈꾼 종합제지기업
한솔그룹은 모태이자 신문용지 전문이었던 새한제지공업의 포트폴리오를 착실히 따라왔던 곳이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이 중앙일보를 창간하며 신문용지로도 확실한 납품처가 있었다. 포트폴리오에 변화가 생긴 건 1991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되면서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은 이병철 창업회장이 골프 라운딩마다 동행할 만큼 총애했다고 알려져 있다. 경영 능력이 워낙 뛰어났지만 아들이 아니라 이병철 창업회장이 퍽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제지업을 맡게 된 것도 1982년 이병철 창업회장이 이인희 고문과 골프를 치다 전주제지(한솔제지) 운영을 권하며 이뤄졌다고. 독립 후 한솔그룹을 한때 재계 서열 11위, '리틀 삼성'까지 키워낸 것만 봐도 증명이 된다.
이인희 고문은 독립 후 '큰 소나무'라는 사명에 걸맞게 종합제지기업을 꿈꾼다. 한솔그룹이 그렸던 종합제지기업은 제작 과정에서의 순환 구조보다는 생산과 유통, 판매단의 종합 그룹이다. 현재 한솔그룹이 유통과 물류 부문의 계열사 한솔PNS 지류유통을 보유한 이유도 이때문이다.
한솔그룹의 근간인 제지업은 한솔제지와 자회사 한솔에코패키징, 한솔페이퍼텍이 담당한다. 한솔제지의 포트폴리오는 크게 인쇄용지와 산업용지, 특수지 등으로 나뉜다. 세 가지 영토를 구축한 때가 1991년부터다.
근간이던 신문용지 부문은 어떻게 됐을까. 독립 후 1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인 1998년 외환위기로 한솔그룹은 신문용지 부문을 떼 매각한다. 전주페이퍼다. 2019년 전주페이퍼 재인수를 검토했다가 포기한 바 있다. 같은 시기 골판지를 다루는 태림포장도 M&A 후보로 고려했다.
◇목재→펄프→제지 '순환구조' 만든 무림
한솔그룹이 생산과 유통 과정의 종합 기업을 노렸다면 무림그룹은 생산 공정의 선순환을 바랐다. 목재에서 펄프로, 제지로 흐르는 생산 순환구조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였다. 2008년 4월 국내 유일의 펄프회사였던 동해펄프(무림P&P)를 사들여 제지의 재료인 펄프 사업으로 영토를 넓혔다. 이듬해에는 울산에 연산 50만t 수준의 펄프와 제지 일관화 공장을 짓는다는 계획도 세웠다.
때문에 한솔그룹과 달리 무림그룹은 주요 계열사 3사가 모두 제지 생산에 관련돼 있다. 무림SP·무림P&P·무림페이퍼 각각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고 있다. 무림페이퍼가 아트지와 백상지, 산업용지, 러프글로스지 등을 제작한다. 무림SP가 친환경용지와 특수용지를, 무림P&P가 펄프와 펄프몰드, 인쇄용지 등을 다룬다.
현재의 기조는 2015년 진주공장 설비투자가 완료되며 굳어졌다. 2013년 글로벌 제지컨설팅 업체인 포리사의 자문을 받아 고급화 프로젝트에 돌입했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부가가치 기능지로 개편했다. 무림페이퍼는 산업용 인쇄용지, 무림P&P는 펄프와 인쇄용지, 무림SP는 특수지로 그룹 내 펄프·제지 3사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이동욱 무림그룹 회장은 1989년 30대의 나이로 회장에 올랐지만 2006년까지 단 한번도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2006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약속한 첫 마디가 '토털 페이퍼 컴퍼니(Total paper company)'다. 종이 제조를 넘어서 사무용품·유통·물류·환경·에너지까지 망라한다는 소망이다. 이후 3세 경영을 거치며 제지업 외의 이종사업도 거느리게 됐다.
◇인쇄·산업·특수 겹쳐진 포트폴리오…슬램덩크·엑소(EXO)의 나비효과
한솔그룹의 제지류 포트폴리오를 한솔제지로 좁혀 구체화하면 인쇄지와 산업용지, 특수지 외에 인스퍼(팬시지)와 감열지, 펄프를 활용한 신소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무림그룹은 무림페이퍼를 중심으로 친환경 용지와 복사용지, 인쇄용지, 산업용지, 특수용지, 생활용지 등을 다룬다. 사실상 전 부문에서 포트폴리오가 겹친다.
다만 우위를 점한 부문은 다르다. 한솔제지는 현재 생산량은 3분기 말을 기준으로 백상지와 아트지, 특수지 등의 인쇄용지와 특수지의 매출비중이 67%를 차지한다. 산업용지가 26% 수준이다. 한솔제지가 앞선 분야는 감열지와 산업용지다. 각각 95%, 48%의 점유율을 보유하고 있다. 인쇄용지는 무림페이퍼가 35% 점유율로 선도한다.
감열지며 특수지 등의 이름은 생소하지만 생활 속 이름으로 바꾸면 조금 더 와 닿는다. 투표용지나 택배 포장 골판지, 책의 인쇄용지와 앨범 제작 고급용지 등이다.
대표적인 승부처가 투표용지다. 투표용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무효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잉크가 잘 번지지 않아야 하고 때문에 종이가 달라붙는 정전기도 없애야 한다. 투표용지를 접었다 펴도 복원력이 좋아야 개표기에 걸리지 않는다. 규격화하기도 쉽지 않다. 선거 때마다 후보자의 수가 달라지니 투표용지의 길이도 유동적이라서다. 2017년 19대 대선에는 28.5cm의 투표용지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 분야의 선두는 무림이다. 2007년 투표용지 제조기술 특허를 따내면서다. 시장점유율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한솔제지가 40%다.
콘텐츠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어떤 창작물에 인쇄용지를 대고 있는 지로도 승부가 갈린다. 대표적인 예가 올 초 열풍을 일으킨 만화 '슬램덩크'다. 여기서 짭짤한 승리를 거둔 건 한솔제지다. 슬램덩크의 만화용지의 60%를 전주페이퍼가, 40%를 한솔제지가 납품했다는 후문이다.
'화보집' 수준으로 발전한 아이돌 가수의 앨범도 마찬가지다. 2015년 발매된 엑소(EXO) 2집의 앨범 제작 지류는 무림그룹이 맡았는데, 이 앨범은 선주문 물량만 50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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