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운송 시장은 1960년대 닻을 올리곤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근 50년간 해마다 적어도 10%씩 성장했다. 안좋은 때가 영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불황은 겪지 못했다. 머스크라인은 연쇄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불렸고 현대상선(현 HMM) 역시 호시절을 누렸다. 1998년 IMF 외환위기조차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불러온 대침체는 세계 무역에 엄청난 타격을 안겼다. 공급이 넘치는 와중에 물동량은 급감했으며, 회복도 지지부진한 상황이 수년간 이어졌다. 산업이 변화했으니 기업도 바뀌어야 했다.
◇머스크 '스타라이트' 전략과 '왕국'의 충돌 머스크는 전통적 가치를 중시하던 기업이다. 2000년 즈음까지만 해도 해운업 특유의 기질이 전반에 깔려 있었다. 본사 통제를 일사불란하게 따르기보다 각국 지사장(Country Manager)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강하고 모험적인 기업가들이 주를 이뤘고 웬만한 신규 사업엔 본사 허락도 요구되지 않았다. 자치권을 가진 영주가 지역마다 있는 것과 비슷했다. 대형선사 상당수가 그랬다.
해운업이 끝 모르고 팽창하던 시기에는 이런 구조의 효용이 있었다. 과감하고 도전적인 리스크 테이킹이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으며 설사 실패하더라도 보듬을 여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해운업이 성숙기에 다다르자 확장보다는 효율이 키워드가 됐다. 더 체계적 시스템이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머스크의 위기 감지는 다른 해운사들보다 기민했다. 먼저 2004년 ‘스타라이트 작전(The Starlight Strategy)’을 감행했는데 17개 지역에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중앙 통제를 강화하려는 목적이었으나 결과적으론 지사장의 권한 축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당연히 반발에 부딪혔다.
대표적으로 스타라이트 전략은 비용절감 차원에서 지사장들에게 고객 규모에 따라 대우 조건에 차등을 두라고 요구한다. 어떤 면에선 전통과의 균열이었다. 머스크엔 고객에게 무조건 최고의 서비스만 제공한다는 암묵적 문화가 100년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Second to none(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이라는 말을 슬로건처럼 여기던 지사장들은 본사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다. 쥐고 있던 권력을 빼앗기는 것도 못마땅했다.
스타라이트는 흐지부지됐다. 마치 왕국처럼 굳어진 지역 조직을 단번에 변화시키긴 어려웠다. 그러나 반드시 달라져야 함은 분명했고 이에 대한 논의는 사라지지 않고 이어졌다. 2008년 유사한 취지로 가동된 ‘스트림라인(StreamLINE)’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스타라이트는 실패했으나 이미 시작된 권력 갈등, 여기서 던져진 화두는 조직문화 전환에 대한 시대적 필요성을 깨닫게 했다.
과거 머스크에선 지사장 자리가 본사 밖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위치라 꼽혔다. 하지만 스트림라인 프로젝트 이후 지역 차원의 직책들이 여럿 만들어진다. 인재들을 해외 파견하면서 권한은 분산되고 본사 통제력은 더 강해졌다. 자율성은 약해졌으며 성과주의 문화가 자리잡았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컨테이너선 운영에서 머스크와 HMM을 포함해 15개 상장 선사의 실적을 종합해보면 총 88억4000만달러의 영업손실(operating loss)을 냈다. 반면 이 기간 머스크는 23억4600만달러의 흑자(operating profit)를 기록한다. 업무의 프로세스화, 의사결정 구조의 혁신에 성공한 영향이 컸다.
◇HMM 대응은 왜 늦었을까 머스크의 쇄신이 선제적이었다면 HMM은 흐름에 단순히 대응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2000년 현대그룹이 3갈래로 갈라지고 HMM이 현대에 포함된 뒤로는 한 박자 늦는 경향이 더 강했다. 현정은 회장을 비롯한 그룹 수뇌들이 해운업을 잘 알지 못했다.
현대그룹은 2000년대 초반 해운 호황기에 선박 대형화 트렌드에서 도태된다. 해운 경기가 악화한 뒤에도 남산 반얀트리호텔를 사들이고 현대건설 인수전에 참여하는 등 몸집을 키우는 일에 더 집중했다.
인사에 대한 불만도 내부에서 적지 않았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사진)은 2003년 그룹 수장에 오른 이후 핵심 경영진과 측근을 외부 출신으로 물갈이했다. 현대건설 인수에 앞장섰던 하종선 전 현대그룹 전략기획본부 사장이 대표적이다.
현대상선 역시 2008년 선임된 김성만 전 대표가 한국유리공업 출신인 외부 인사였다. 2011년 내부 인사인 이석희 전 대표로 교체됐으나 그 뒤 현대상선이 2016년 현대그룹에서 분리되기까지 대표가 5번이나 바뀌었다. 재임 기간을 셈하면 평균 2년에 못 미친다. 해운 경기를 길게 전망하지 못하게 하는 보여주기식 단기 경영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나온 것은 그래서다.
구조적 문제 역시 작용했다. 컨테이너 정기선은 대형자본 투입이 필요한 기간사업이다. 시장분석과 예측을 위해서는 정보 획득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덴마크는 덴마크선박금융기관(DSF) 등 선박관련 금융이 활성화된 데다 국제해운거래소, 발틱해운거래소가 가깝다. 해운 및 선박금융의 요충지인 독일 함부르크, 노르웨이 오슬로 등도 인근이었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해운시황이나 금융 정보를 얻기 유리했다. 덴마크 국적선사인 머스크가 글로벌 금융위기에 빠르게 대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짐작된다.
반면 HMM은 금융위기가 막바지에 온 2009년에 와서야 7년 만의 인원감축에 나선다. 당시 67명의 희망퇴직 신청을 접수했고 2013년에도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그리고 3년 뒤 결국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채권단에 공동관리를 신청한다. 변화는 상황에 떠밀리듯 이뤄졌으며 혁신보다는 조직 슬림화의 모습을 띠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해운업의 부활을 가져왔다. HMM에 천운과 다름없었다. 되살아난 실적은 오히려 추가적인 인적 쇄신의 길을 열어줬다. HMM은 영업이익이 10조원에 육박한 지난해 연말에 근속 10년 이상의 육상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다. 재정문제로 위로금을 주지 못해 쌓였던 인사적체를 해소하기 위한 취지였다.
◇'가족주의' 가치의 변화 앞서 머스크 역시 인사 칼바람은 피해가지 못했다. 스트림라인 프로젝트 과정에서 여러 직원들이 회사를 떠나거나 해고당했다. 인력 구조조정에 유연해진 만큼 전처럼 단단한 결속력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가족과 충성심(loyalty)'이 주요 가치로 요약되던 머스크의 문화가 '성과와 결과' 중심으로 바뀌었다. 2020년 말엔 실적 반등에도 불구 무려 2000명의 직원을 감축하기도 했다.
배려(constant care)와 겸손(humbleness), 정직(uprightness), 머스크의 이름(our name) 그리고 머스크의 직원(our staff). 매키니 묄러 회장이 내세운 머스크그룹의 이 5가지 핵심가치 가운데 직원에게 내어주었던 몫이 대폭 작아진 셈이다.
하지만 매키니의 딸 아네 우글라(Ane Mærsk Mc-Kinney Uggla) 회장(
사진)은 2019년 사보에서 이야기한다. “전환의 시기가 오면 가치는 도전에 직면할 수 있고 또 직면해야 마땅하죠.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이 가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