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머스크 라인(Maersk Line)은 MSC와 세계 1위를 다투는 덴마크 해운사다. 오래 지킨 선두를 지난해 MSC에 뺏기긴 했으나 이름이 가진 위상은 여전히 덜해지지 않았다. 글로벌 8위 HMM과 비교하면 규모도 압도적이지만 긴 역사에서 오는 무게가 있다.
130여년 전 설립된 머스크는 창업주의 뿌리를 지금껏 그대로 유지해왔다. 반면 HMM은 수년 전 해운업에 닥친 기록적 불황에 휩쓸려 현대그룹의 울타리를 잃었다. 여기에 머스크의 책임이 어느정도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칠각별의 희망
선박의 굴뚝(Funnel)엔 선사마다 고유한 문장이 달린다. 머스크는 하늘빛 배경에 그려진 칠각별이 상징하고 있다. 창업주의 아버지 피터 묄러(Peter Mærsk Møller) 선장이 1886년 첫 증기선 '로라(Laura)'를 구입했을 때 만들었던 장식이다.
"굴뚝의 작은 별은 내가 당신을 위해 초조하게 기도한, 흐린 하늘에 부디 별이 나타나길 빌었던 저녁을 떠올리게 합니다. 신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줬다는 표식이에요." 당시 중병에서 회복한 아내 안나에게 피터 선장은 편지를 써 설명했다.
수년 뒤 피터 선장이 아들 아놀드 묄러(A.P.Møller)와 조그맣게 차린 선박회사 스벤보르그(Svendborg)가 머스크의 전신이다. 1904년 회사의 로고를 정하게 된 묄러 부자는 피터와 안나의 칠각별을 골랐다.
이후 A.P.묄러는 세 척짜리 회사였던 스벤보르그를 크게 키우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너무 빠른 성장을 걱정한 이사회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는 노선을 달리해 1912년 증기선사(Dampskibsselskabet af 1912)를 따로 세웠는데 두 회사는 나중에 'A.P.묄러 – 머스크'로 합쳐진다. 작은 별 역시 묄러를 따라가 머스크 선단의 상징이 됐다.
정말 행운의 징표였을까. 머스크는 수십년간 순풍에 돛 단 듯 항해한다. 1914년 시작된 1차 세계대전이 해운 황금기를 가져왔고 머스크는 전쟁물자를 옮겨 천문학적 수익을 올렸다. 온당치 못한 이익이 아닌가. 묄러는 불안을 느꼈으나 군수물자 운송이 머스크에 대단한 부를 가져다 준 것은 분명했다.
1918년엔 직접 배를 건조하기 위해 오덴세 조선소(Odense Steel Shipyard)를 세웠다. 묄러의 오랜 바람이었다. 전쟁에서 쌓은 수익 대부분을 잃더라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선박이 많아지자 기항지는 늘고 사업도 쑥쑥 컸다. 1928년 세계 최초로 정기선 서비스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다 1940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 머스크 본사가 있는 덴마크를 독일군이 점령한다. 배를 독일에 빼앗기고 연합군에 징발당한 머스크는 46척이었던 선박이 전쟁이 끝날 무렵 7척으로 줄었다. 하지만 수모에도 불구 3년 만에 빠르게 몸집을 되찾았다.
◇'마일스톤'된 컨테이너선
그 뒤 머스크는 일본과 홍콩, 인도네시아, 페르시아만로 사업을 확장했는데 주로 유조선으로 원유를 실어 날랐다. 1970년대 이미 덴마크 최대의 선박회사였지만 소인국의 거인에 불과했다. 글로벌 무대에선 아직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사운을 완전히 바꾼 것은 컨테이너 운송이다. 선박의 컨테이너화는 세계 무역을 완전히 변화시켰으며 머스크 역시 여기에 올라탔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다. 머스크는 분단된 지역이 막고 있던 새로운 기회를 거머쥐었다. 1990년 해운 서비스 루트가 40개 수준이었으나 10년 만에 100개국으로 넓혔다. 2010년대 중반 해운업계 전체가 어려워지자 머스크는 낮은 운임으로 경쟁 선사들을 하나씩 고사시켜 살아 남았다. 이제 130개국가에 기항하며 730개가 넘는 선박을 운용하고 있다. 직원 수는 10만명 이상이고 덴마크 GDP의 약 10%를 책임진다.
지금도 머스크는 모든 선박을 칠각별의 배경인 하늘색으로 칠하고 있다. 1886년부터 쓰인 색으로 덴마크에서 4년 전 상표등록까지 마쳤다. 일명 '머스크 블루(Maersk Blue)'로 불린다. 137년간의 행운과 역경이 담긴 머스크의 자랑이다. 지난달 공식 SNS에 회사는 이런 글을 올리기도 했다. "머스크 블루를 입히면 모든 것이 멋져 보입니다. 세월의 시험을 견뎌낸 색이죠."
◇리바노스와의 정주영의 딜
머스크와 비교해 HMM은 비교적 역사가 짧다. 1973년 1차 오일쇼크 당시 현대중공업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주문받은 배를 다 지어놨더니 유조선이 필요없어진 선주들이 찾아가질 않았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조지 리바노스 회장이 그중 한 사람이다. 정주영 회장이 처음 조선업 진출을 준비할 때 울산 백사장 사진만 보고 배를 발주해줬다는 첫 고객.
사업 확장을 위해 값싼 배를 원하던 리바노스는 정주영 회장에게 유조선 2척을 주문했는데 조건이 다소 터무니없었다. 가격을 500만달러나 깎더니 배를 2년 반 안에 달라고 했다. 결국 현대중공업은 2년 3개월 만에 조선소를 짓고 선박 건조까지 마쳤다. 5년은 걸릴 일을 밤낮없이 단축했다.
하지만 리바노스는 온갖 구실을 붙여 개조를 요구했다. 그러다 인도일자를 하루 넘겼다는 이유로 두 척 중 '애틀랜틱 배러니스'호를 인수할 수 없다고 밀어붙였다. 애초부터 가져갈 생각이 없었다. 결국 정주영 회장은 계약금을 돌려주는 대신 리바노스로부터 새로 배 한 척을 발주받기로 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갈 곳 없어진 배들을 가지고 정주영 회장은 1976년 3월 해운사 '아세아상선'을 설립한다. 애틀랜틱 배러니스에서 이름을 바꾼 '코리아 썬', 그리고 ‘코리아 스타’와 '코리아 배너' 세 척이다. 의도야 어쨌든 조선사 창업을 도운 리바노스가 해운업 진출까지 조력한 결과가 됐다. '위기는 기회'라는 정주영 회장의 평소 입버릇처럼.
◇HMM, '현대'를 잃다
아세아상선은 설립 첫 해 유공과 장기용선 계약을 맺으며 원유 수송의 국적선 시대를 열었다. 1983년엔 현대상선으로 사명을 바꾼다. 'HMM(Hyundai Merchant Marine)'이라는 이니셜의 유래다. 이후 1985년 동해상선과 신한해운, 1988년 고려해운을 차례로 집어삼키면서 덩치를 불렸다. 1995년 코스닥에 상장했으며 1999년 한소해운을 흡수합병했다.
그러나 2000년 현대가(家)에 일어난 '왕자의 난'이 HMM에도 후폭풍을 안긴다. 정주영 회장의 차남 정몽구 회장, 5남 정몽헌 회장이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현대그룹은 현대와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으로 흩어졌다. HMM은 3개 갈래 중 현대에 포함됐다.
사세가 작아진 현대그룹은 2010년 HMM에 닥친 유동성 위기를 지원해줄 여력이 부족했다. 매출70%를 지탱하는 가장 큰 돈줄이 HMM이었다. 외환은행(현 하나은행)이 현대그룹에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요구했는데 완강히 거부하기도 했다. 현대건설을 인수하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후 잠깐 위기를 벗어나긴 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설상가상 2016년 사상 최악의 침체기가 해운업을 덮친다. HMM은 끝내 그 해 8월 계열분리되면서 현대그룹 품을 떠났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300억원의 사재를 털고 대주주 무상감자까지 동의했지만 HMM을 지키지는 못했다. HMM의 이름 역시 '현대'의 의미를 잃고 형태만 남았다. 40년 만의 이별을 촉발한 해운업의 위기엔 운임을 덤핑한 머스크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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