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 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혁신을 말할 때 보통은 해운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10년 전 해마다 책을 추천하기 시작한 빌 게이츠는 마크 레빈슨의 'THE BOX'를 가장 먼저 리스트에 올렸다. 컨테이너 운송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었는가를 설명하는 책이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사로 꼽히는 머스크 라인의 역사는 이 수송 혁명과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명(明), 암(暗)이 모두 있다. 선박 대형화로 시장을 선도했지만 그 과정에서 해운업 불황을 부추긴 것도 머스크 라인이었다.
◇'Containerization(컨테이너리제이션)' 혁명
1975년 9월 5일 '에이드리언 머스크(ADRIAN MÆRSK)'호가 385개의 컨테이너를 싣고 미국 엘리자베스항에서 출항한다. 해운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컨테이너 정기선 서비스가 시작된 기점이다.
원래 머스크는 선박의 컨테이너화(Containerization)에 꽤 늦게 합류했다. 컨테이너가 등장하기 전 해상 운송은 비싸고 형편없었다. 화물 종류가 천태만상이라 상자부터 드럼통, 자루까지 난무했다. 노동자 수십명이 몇 주간 달라붙어야 비로소 선적할 수 있었다. 짐을 싣고 내리는 시간이 배가 바다를 건너는 시간과 같았으며 화물은 자주 분실되고 부서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공산품은 자국 조달이 기본이었다. 커피원두나 향신료, 위스키 같은 특산품만 예외가 됐다.
종일 선박에 짐이 선적되길 기다리던 트럭 운전사 말콤 맥린(Malcom McLean)은 어느 날 생각한다. 얼마나 더딘 일인가. 트레일러를 통째로 배에 올리면 간단하지 않을까. 맥린은 컨테이너를 창안해냈다. 문제는 표준화였다. 해운사들은 규격을 두려워했다. 고객을 독점하기 힘들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컨테이너선은 1956년 취항했지만 1968년이 돼서야 길이 20피트, 40피트로 컨테이너 규격이 정해졌다. 영향은 대단했다. 기계화가 이뤄져 운송량이 5배 늘고 운송비는 60% 줄었다. 무역량 역시 급증했다. '화물을 박스(컨테이너)에 넣어 옮긴다'는 단순한 개념이 세계를 좁게, 경제는 더 크게 만들었다. 어떤 전문가들은 컨테이너화가 증기선 발명보다 세계 무역에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뒤늦게 탑승한 머스크, 카드는 '대형화'
머스크는 잠재력이 엄청난 시장에 탑승할 기회를 하마터면 놓칠 뻔 한다. 컨테이너화가 이미 진행된 1960년대 중반, 머스크는 아직도 팰릿(Pallet)을 이용하는 재래선 방식에 머물러 있었다. 전환을 결정한 것은 창업주 A.P.묄러의 아들 매키니 묄러(Mærsk Mc-Kinney Møller)다. 매키니는 1965년 부친이 숨지자 회장으로 취임해 경영을 맡았다. 컨테이너화를 고민하던 그는 1971년 맥킨지에 컨설팅을 요청해 회사의 전망을 물었다. 분산된 수익구조가 필요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나치게 막대한 투자가 필요할 것이란 내부 반발을 무릅쓰고 매키니는 1973년 첫 컨테이너선 '스벤보르그 머스크'호를 주문한다.
그리고 1975년 아시아와 미국 동부 해안을 잇는 컨테이너 정기선 서비스가 닻을 올렸다. 진출이 늦었던 대신 머스크는 '정기선'에 집중해 경쟁 선사들과 차별점을 뒀다. 정기선은 정해진 항구 사이를 정해진 일정에 따라 반복 운항하는 배를 말한다. 짐이 많든 적든 항해하므로 거대 자본이 필요했지만 매키니는 '모 아니면 도'라고 봤다.
선박 대형화를 리드한 것 역시 머스크다. 2000년대 해운의 패러다임은 속도였으나 2008년 리먼 사태이후 유가가 치솟으며 대형화로 흐름이 바뀌었다. 선박 크기를 두배로 늘려도 건조나 연료, 운영비용이 두배로 뛰진 않았기 때문이다. 대형선을 띄우면 자연히 톤당 비용은 하락했다.
컨테이너 수송 초창기인 1960~1970년만 해도 가장 큰 배가 1700TEU급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머스크는 1996년 6600TEU급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을 건조, 2011년엔 1만8000TEU의 '트리플-E'급 선박을 무려 20척 발주했다. 결국 머스크는 선발주자인 미국 해운사들을 압도하고 컨테이너 무역의 지배자가 됐다.
문제는 머스크의 선대 확충이 글로벌 치킨게임을 촉발했다는 점이다. 규모의 경제를 이룬 머스크는 운임을 후려쳐 대형화 여력이 없는 선사들을 도태시키는 전략을 썼다. 돈 있는 선사들은 경쟁적으로 큰 배를 사들였다. 이 방식은 해운시장에 공급과잉을 초래했으며 침체가 장기화된 2016년, 기록적 불황이 찾아왔다. 상하이 컨테이너 운임지수(SCFI)가 400포인트로 사상 최저를 찍었다.
◇퇴장한 한진해운, HMM의 기적적 생존
HMM은 대형화 트렌드에 뒤처졌던 곳 중 하나다. 덴마크 해사 컨설팅업체 '씨인텔 마리타임 어낼러시스(SeaIntel Maritime Analysis)'의 라스 젠슨(Lars Jensen) CEO는 "더 큰 선박을 주문하지 않으면 컨테이너선사 일부는 아시아-유럽 항로에서 극복하기 힘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2011년 경고한다. 일본과 홍콩 선사, 그리고 HMM(당시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파도같은 추세를 이기지 못한 HMM은 같은 해 9월 1만3100TEU급 컨테이너선을 5척 발주했다. 그래도 여전히 8000TEU급 소형선이 주력이었다. 이미 유동성 위기에 처해있던 터라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한진해운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결국 고꾸라졌다. 국내 1위, 세계 7위 컨테이너 선사였던 한진해운은 2016년 8월 31일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이듬해 2월 2일 파산절차에 돌입, 보름 뒤 파산했다. 해운사에 보기 드문 비극이었다.
한진해운이 시장에서 퇴장한 이후 그 몫의 물동량은 머스크와 MSC, 중국선사들이 가져갔다. 정부는 HMM이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판이했다. 한진해운이 일으킨 물류대란으로 화주들이 피해를 보면서 한국 선사에 대한 보이콧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HMM은 한진해운과 함께 채권단 관리를 받게 됐는데 운명은 다르게 흘렀다. 재무구조 개선방안 마련이 늦어져 잡음을 빚었던 한진해운과는 채권단 교감에 차이가 있었다. HMM은 채권단에 자율협약을 신청하기 전부터 구조조정을 시작했으며 자율협약에 돌입했을 때 이미 자산매각이 상당 부분 진전된 상태였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HMM 경영권을 내려놓고 사재 300억원을 출연해 책임감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HMM은 대규모 공적자금을 수혈받아 KDB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되면서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왔다. 현재 산업은행이 지분의 20.69%, 해양진흥공사가 19.96%를 보유하고 있다. 지원 당시 '어차피 망할 기업에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난이 있을 정도로 재기가 힘들다 여겨졌는데 2020년 흑자전환했다. 머스크가 일으킨 격랑에 휩쓸렸으나 가까스로 살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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