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당시 사람들이 CFO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계기 비행을 하는 자’라고 말했지요.”
일전에 윤종규 전 KB금융지주 회장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KB금융에 태평성대를 가져온 최고경영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좀 더 오랜 과거엔 실력이 출중한 CFO기도 했다. 그가 국민은행 CFO라는 타이틀을 달았을 당시 국내엔 ‘CFO’라는 직함이 매우 생소했다고 한다. 외국계 기업들이나 쓰는 용어였던 만큼 그가 CFO로 등장했을 때 대체 뭘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고 한다.
윤 전 회장이 빗댄 ‘계기 비행’이란 주변 시야 환경이 충분치 않은 궂은 날씨에 조종사가 감에 의존하지 않고 항공기에 장착된 계기만을 통해서 운항하는 비행을 말한다. 반대말로는 ‘시계 비행’이 있겠다. 주변 가시거리가 넓은 상태에서 조종사가 직접 눈으로 주변 장애물을 인식하면서 감각과 경험으로 비행하는 방식이다.
윤 전 회장은 기자에게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경영환경에서 미래 예측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자료나 데이터, 숫자를 근거로 하는 경영이 필요하다”며 “여러 방면으로 분석을 해보고 최적의 방향을 제시하는 게 CFO의 역할이라고 22년 전에 말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22년 전 윤 전 회장의 일성은 작금의 시대에도 통한다. 2024년을 마무리하며 올 한 해를 돌이켜봤을 때 ‘계기 비행’의 중요성을 간과해 큰 사태를 초래한 일들이 많았다. 티메프 사태의 근원은 근시안적 외형지표만 찍고 보려는 경영진의 패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매출채권 회수 주기보다 재고 구매와 매입채무 상환 주기가 긴 경우 이를 ‘무이자 유동성’으로 대충 착각하는 유통업체들이 많다. 정확한 진단을 바탕으로 브레이크를 걸어줄 경영진이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최근 금융당국으로부터 역대급 제재를 받은 3000억원 규모의 경남은행 PF(프로젝트파이낸싱)대출 횡령 사태도 마찬가지다. 금융권 횡령 사고 중 최대 규모였는데 한 직원의 일탈을 막을 내부통제가 행내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장부상 숫자들을 치밀하게 종합하고 맞춰봤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일이다.
내년 역시 힘든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위기에 대비하듯 재계에서는 소위 '재무통'들을 속속 발탁, 전면에 배치했다. 비행기 조종석 앞과 옆에는 수십개가 넘는 계기와 스위치, 레버 등 장치들이 둘러싸고 있다. 비행기의 상승·하강 속도, 높이, 기울기, 엔진 회전수, 방위 등 비행기를 안전하게 운항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가 정확히 측정된다. CFO들도 나아갈 방향을 보여줄 각자의 ‘계기판’을 만들어야 한다. 어려운 시기 상하좌우 전후 모두를 살필 수 있는 경영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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