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의 곳간지기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역할은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업권별로 그 역할과 무게가 다르다. 바이오텍 CFO는 단순히 재무·회계 등 숫자만 잘 알면 되는 정도가 아니다. 무르익지 않은 기술을 투자자들에게 선뵈며 투자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 때로는 기술수출 현장을 직접 뛰며 사업 중심에 서기도 한다. 이 같은 바이오텍 CFO 역할은 투자 혹한기인 지금 시점에 그 중요성이 배가 된다. 기술이 바이오텍의 존재의 이유라면 CFO는 기술의 생존을 이끌어 내는 키맨이다. 최근 주목받는 바이오텍의 CFO를 만나 혹한기 생존전략을 물었다.
"재천아, 밖은 춥다"
이재천 에이비엘바이오 부사장(사진)이 딜로이트 컨설팅을 관두고 바이오텍을 만들겠다고 나설 때 선배들이 했던 말이다. 창업이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에 주변의 만류는 당연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보기좋게 깨졌다. K-바이오의 역사를 새로 쓴 중심에 이 부사장이 섰다. 더벨은 그를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보수적 자금 운용 기조에도 'R&D 투자'는 과감하게
에이비엘바이오가 프랑스 사노피와 1조원대 빅딜을 체결할 수 있던 배경에는 똘똘 뭉친 맨파워가 있다. 한화케미칼로부터 바이오사업부 폐지를 통보받은 뒤 이상훈 대표와 뜻을 같이한 연구원들은 이직 대신 바이오텍 창업을 결심했다.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이 부사장은 "이 대표와 나는 서울에, 나머지 연구원들은 대전에 살던 시절이어서 모든 창업과 연구개발(R&D) 논의는 서울역 역사 안에 있는 회의실에서 진행했다"며 "이 대표는 바이오사업부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한화케미칼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초창기 그를 대신해 임시 대표직을 맡게 됐다"고 회상했다.
하나의 목표를 바라보며 어려운 시기를 함께 겪었기에 창업 멤버 간 유대감은 더욱 끈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인력 이탈이 거의 없었던 덕분에 R&D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 에이비엘바이오는 창업 후 C레벨급 임원 및 R&D 인력 변동이 적은 업체로 정평이 나 있다.
창업 당시 이들이 내건 비전은 분명했다. 바이오텍 성공 사례를 만들자는 것. 이 부사장은 "아직 국내에서 제넨텍, 길리어드 등과 같이 소규모 바이오텍으로 시작해 글로벌 빅파마로 성장한 사례는 없다"면서 "A Better Life라는 사명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한 혁신적인 치료제를 개발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게 초기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는 비전"이라고 했다.
회사가 꿈을 현실로 만들 역량을 보유했다는 점을 투자자들에게 설득하는 게 최고재무책임자(CFO)의 역할이다. 그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기술을 개발하고 기술수출을 통해 사업성을 입증하겠다는 점을 한결같이 강조해 왔다. 그리고 실제 성과를 내면서 약속을 지켰다. 신뢰할 수 있는 회사로 포지셔닝하면서 상장하기도 전에 990억원에 달하는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었다.
이 부사장이 보수적인 자금 운용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은 것 역시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재무적인 측면에서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하는 편"이라며 "이미 신약개발이라는 사업 자체가 임상 실패라는 고위험을 수반하기 때문에 회사의 소중한 자원을 운용할 때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조심스러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R&D 투자는 과감하게 집행한다. 이 부사장은 "R&D는 일정 임계치 이상의 재무 자원이 투입되지 않을 경우 그 결과물을 기대할 수 없다"면서 "이에 따라 이제껏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R&D 비용을 투자해 왔고 다행히 최근 그 결실을 보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노피 딜 다음 재도약 준비, 지속가능 발판 마련 주력
국내 바이오 업계서 에이비엘바이오의 흑자전환은 상징적이다. 상장 후 단 한번의 차입이나 증자 없이 기술수출로만 일군 성과라는 점에서다. 사실 신약개발 바이오텍에 있어 재원 확보는 생존이 걸린 문제다. 외부 자금 조달을 추진하지 않기로 한 건 꽤나 중대한 결단이다. 에이비엘바이오는 어떻게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런 담대한 결정은 회사 기술력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됐다. 이 부사장은 "빅파마로 기술수출은 매우 어렵고 최종 서명할 때까지 불확실성도 크지만 성공하면 차입이나 증자 없이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면서 "당사는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만큼 기술수출만으로 자금을 확보하고 지속 성장해 나가기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바이오텍 특유의 유연하면서도 신속한 의사결정 프로세스도 한몫했다. 이 부사장은 "대기업과 달리 무조건 따라야 하는 자금조달 결정 프로세스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며 "대표를 포함한 임원진그리고 회사를 잘 아는 직원들까지 모여 다양한 의견을 나눈 뒤에 최선의 결정을 내린 결과"라고 덧붙였다.
신약개발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지만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은 여전하다. 흑자 바이오텍 명성을 이어가려면 사노피 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우려의 시각도 존재한다. 넥스트 스텝을 준비하는 이 부사장이 내린 답은 R&D 투자다. 중추신경계(CNS) 치료제에서 항암제로, 조기 기술수출 모델에서 자체 임상 진입으로 사업 저변을 넓히면서 재도약을 예고했다.
시장의 관심을 모은 부동산 투자 역시 장기적인 성장 플랜의 일환이었다. 단순 '소유'의 개념을 넘어 '활용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판교 내 분산돼 있는 조직을 하나의 장소에 모으고 연구 공간을 확충해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사옥 위치가 삼성동인 만큼 브랜딩 강화 및 핵심인력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사장은 "처음부터 건물 매입을 염두에 두고 투자를 한 것은 아니고 좋은 기회에 부동산 투자 제안이 왔고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펀드를 매입하게 됐다"면서 "이후 해당 건물이 매물로 나오며 장기적으로 회사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취득을 결정했다"고 했다.
국내 바이오텍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이 부사장. 그는 신약개발 바이오텍 CFO는 회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재무회계 및 자금 관리뿐만 아니라 IR·PR, 전략 총괄 나아가 사업개발(BD) 등까지 담당할 수 있는 이유도 창립 멤버로 경영 전반은 물론 기술에 대해서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사장은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2022년 세운 미국 법인 'ABL Bio USA'에서는 대표를 맡으면서 BD를 담당하고 있다"면서 "에이비엘바이오 창립 초기부터 BD에도 참여해 왔고 전략 부문에 대한 경험도 풍부했기 때문에 미국 법인 대표직을 겸임하게 됐다"고 했다.
이어 그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으로 "바이오텍 CFO는 R&D 현황이나 회사의 기술 등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어느 시점에 어떤 프로젝트에 자원을 투자하는 것이 적절한가를 지속 고민하고 회사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분야에는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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