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를 얇게 만들어 음극재에 전류가 흐르도록 하는 집전체 역할을 하는 동박은 배터리 소재 중 기술장벽이 상대적으로 높은 제품이다. 얇으면서도 뛰어난 강도를 유지해야 한다. 10년 전만 해도 일본 업체들이 세계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현재는 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올랐다는 평가다.
국내 동박 사업 플레이어였던 LS그룹과 일진그룹은 일본에 수출할 수 있을 정도의 품질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을 정도로 기술력 확보에 공을 들였다. 두 그룹의 기술경영은 우리나라 동박 기업들이 기술 리더십을 갖출 수 있게 된 기반이 됐다. 두산그룹은 후발주자로 룩셈부르크 기업을 인수하는 형태로 동박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에도 전기차용 동박 사업은 미래가 유망하다는 기대를 받았지만 수익화 자체가 쉽지 않았다. 대규모 증설 자금에 대한 부담도 컸다. 국내 동박 3사가 2020년 이후 모두 최대주주 손바뀜을 겪은 것은 이런 상황과 무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SK넥실리스·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솔루스첨단소재...재계 상위권 그룹이 주도 국내 동박 산업을 이끄는 기업으로는 SK넥실리스와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솔루스첨단소재가 꼽힌다. SK넥실리스의 전신은 LS엠트론의 동박·박막사업부다.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는 일진머티리얼즈, 솔루스첨단소재는 두산솔루스에서 최대주주 변경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견으로 분류되는 일진그룹을 제외한 LS그룹, 두산그룹 모두 대기업이기는 했다.
LS그룹과 두산그룹이 재계 순위 10~20위권에 이름을 올린 대기업이라면 현재 동박 시장을 주도하는 SK그룹과 롯데그룹은 각각 재계 2위, 6위로 최상위권 대기업이다. 솔루스첨단소재가 PEF 운용사를 대주주로 두고 있는 특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국내 동박 업체들이 M&A를 통해 이름값을 높였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같은 변화를 야기한 것은 충분히 무르익지 않은 시장 상황의 영향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이차전지 기업인 LG에너지솔루션도 2021년이 돼서야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이전까지는 이익은 나지 않는데 기술력 확보와 수요 확대로 투자금은 계속 소요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유망한 미래 사업이라고 해도 성장성 하나만 보고 적자를 감내할 수 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비주류' 동박 사업의 설움 배터리 사업만 해도 적자를 내면서도 지속해야 하냐는 회의론이 팽배했던 시절이다. 소재 사업도 비슷한 분위기였을 것이다. 동박 사업 역시 충분한 수익을 내지 못했고 각 기업의 '비주류' 사업으로 분류됐다. 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구조조정이 필요한 상황이 되자 곧장 매물이 됐다.
LS엠트론은 과거 세계 1위를 목표로 잡았을 정도로 동박 사업에 대한 의지를 나름대로 보여왔다. 2011년경에는 이차전지용 동박 생산능력 확대를 위해 5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2013년에는 6마이크로미터(㎛)의 전지용 동박을 세계 최초로 이차전지에 적용하며 기술적 한계를 돌파하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동박사업부의 적자가 2015년까지 지속되며 LS엠트론의 주력 사업부로 자리 잡지 못했다. LS엠트론이 주력 사업 중심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기로 결정했을 때 동박 사업은 자연스레 비핵심 사업으로 분류됐다. LS엠트론은 동박·박막사업부를 미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매각하기로 결정했고 KKR은 2018년 동박·박막사업부와 더불어 LS오토모티브를 더해 1조원여에 인수했다. 이중 동박·박막사업부의 가치는 3000억원 정도로 쳤다. 이후 2년 후 SK그룹의 화학·소재 계열사 SKC가 1조2000억원에 KCFT(과거 LS엠트론 동박·박막사업부)를 인수하며 현재의 SK넥실리스가 탄생했다.
솔루스첨단소재도 비슷한 절차를 밟았다. 두산그룹은 2014년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룩셈부르크 동박 제조사인 서킷 포일을 인수했다. 2019년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동박 사업을 비롯한 첨단소재 사업을 한데 모아 두산솔루스(현재 솔루스첨단소재)가 출범했다.
두산그룹의 신사업 계열사로 기대를 받기도 했으나 2020년 두산솔루스 역시 매물이 됐다. 당시 두산중공업(현재 두산중공업)은 유동성 위기를 겪으며 산업은행 및 수출입은행으로부터 3조원을 긴급 지원을 받았다. 이후 두산그룹은 채무 상환을 위한 자산매각에 나섰는데 두산솔루스도 이중 하나였다. 두산솔루스가 매년 창출하는 영업이익 규모가 많아야 300억원 수준에 불과하는 등 재무적 기여가 크지는 않았던 만큼 매각을 결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 PEF 운용사 스카이레이크가 두산솔루스의 지분 53%를 6986억원에 인수했고 솔루스첨단소재로 사명을 변경했다.
◇대규모 투자 부담됐나…롯데에 길 터준 일진 일진그룹의 일진머티리얼즈(현재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매각은 LS그룹이나 두산그룹과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일진머티리얼즈는 매년 5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내는 탄탄한 계열사였다. 1970년대 일찌감치 동박 개발에 나서 국산화에 성공하며 기술력을 갖췄고 삼성SDI 등 우량한 고객사도 확보했다.
일진그룹이 일진머티리얼즈 매각에 나선 시점은 2022년으로 다른 동박 기업들에 비해 늦은 편이다. 이 기간 일진머티리얼즈는 일진그룹의 주력 계열사로 자리잡았고 사업 성장성에 대한 내부적인 기대도 컸다. 때문에 일진머티리얼즈 매각설이 돌았을 그룹 임직원들은 물론 시장 관계자들 모두 놀라워하는 반응이었다.
매각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지만 시장에서는 일진그룹이 일진머티리얼즈를 성장시키기에 부담을 느꼈다고 추정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장상황에 맞춰 유연하고 과감한 투자를 하는 것이 중견그룹으로서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던 만큼 일진머티리얼즈 매각가는 매우 높은 수준으로 책정됐다. 롯데그룹의 화학 계열사 롯데케미칼은 일진머티리얼즈 지분 53.3% 등을 2조7000억원에 인수했다. SKC가 KCFT 지분 전량을 인수하는데 1조2000억원이 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금액대가 높다.
롯데그룹으로서는 전기차 배터리 소재 사업의 핵심 플레이어로 진입하기 위한 차원에서 일진머티리얼즈 인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관련업계 관계자는 "이차전지 관련 사업에 늦게 진출했던 만큼 높은 프리미엄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듯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