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많은 데 쓸 돈이 없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어떤 생각이 들까. 삼성전자 얘기다. 시장과 언론에서 자주 거론되는 '현금성자산 100조원'은 삼성전자의 재무여력을 상징하는 문구다.
하지만 한국 본사는 생각보다 돈이 없었다. 반도체 투자를 위해 자회사(삼성디스플레이)에게 빌리고 해외법인들로부터 역대 최대규모 배당을 받으며 총 44조원을 끌어와야 했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연결재무제표의 맹점이기도 하다. 2011년 국제회계기준(IFRS)이 도입되면서 연결재무제표가 기본 재무제표로 채택됐고 기업의 실적공시도 연결재무를 기준으로 한다. 업체가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회사들을 단일 경제적 실체로 보고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방식이다. 이 탓에 현금자산의 80% 이상이 종속자회사에 분산돼 있는 삼성전자의 경우 본사 곳간 사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박학규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전사 CFO)과 김홍경 DS부문 경영지원실장(반도체 CFO) 앞에는 난국을 돌파할 여러 선택지가 놓였다. 일단 회사채 등을 통한 외부차입은 배제. 40조원 넘는 돈을 국내 자본시장에서 조달했다가는 시장 유동성에 문제가 생길 정도라고 한다. 해외 자본시장에서 조달하려면 번거로운 여러 절차를 밟아야 한다. 쌈짓돈으로 수십조원이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쌈짓돈을 꺼내 쓰기로 했으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린다. 자금을 끌어올 종속회사의 재무건전성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그 회사 임직원들의 불편한 심기를 최소화하는 선에서, 최대한 누수 없이 끌어와야 한다. 삼성디스플레이에는 차입 형태로, 해외자회사에서 배당 형태로 가져온 것도 이런 점을 염두에 뒀다. 그 와중에 해외법인 배당세제 개편으로 세금누수가 가벼워진 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제 차입금 상환여력 마련과 별도기준 연 30조~40조원 시설투자를 감내할 만큼 현금창출력을 대폭 개선하는 일이 남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반도체 경기가 회복돼야 한다.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 하반기에 적자 폭이 줄고 내년쯤 흑자로 돌아설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전자의 이번 차입·배당 이슈가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 반도체 경기에 따라 본사 곳간이 바닥날 수 있는 부분은 확실히 리스크로 보인다. 연결자회사에 현금이 쏠려있는 재무구조의 개선 필요성도 제기된다. 물론 내부 재무라인의 시각은 다를 수 있다. 아우들에게 손 벌리는 사상 초유의 일을 그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CFO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