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종속자회사들로부터 수십조원 규모의 차입과 배당을 끌어온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지난 십 수 년간 반도체 불황(다운턴) 사이클이 몇 번 있었지만 가장 많은 배당을 받은 게 6조원 수준이었다.
삼성전자 본사의 곳간이 비기 시작한 계기는 2021년 초반에 이뤄진 대규모 특별배당이 꼽히고 있다. 그 당시 반도체 시장이 호황(업턴)세에 접어들면서 삼성전자가 인텔을 제치고 반도체 매출 1위에 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작년부터 갑작스런 다운턴이 시작된 게 결정타였다.
◇지난 12년간 많아봐야 6.5조…22조 배당은 전무후무 2011년부터 작년까지 지난 12년간 삼성전자의 별도재무제표 기준 배당금 수입은 1조원 안팎이었다. 2조원 이상을 넘어선 적은 2019년(4조6251억원), 2021년(6조5600억원), 지난해(3조5514억원) 정도다. 본사가 올 상반기처럼 22조원을 종속회사들로부터 배당으로 끌어온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다.
삼성전자 본사가 연결자회사로부터 조 단위 차입을 한 적도 없다. 본사와 종속회사 간의 자금거래를 보면 오히려 시혜를 베푸는 쪽에 가까웠다. 예컨대 2016년 11월 자동차 전장부품 업체 '하만'을 인수하기 위해 본사가 미국법인 SEA(Samsung Electronics America)에 9조3385억원을 유상증자 형태로 넣어줬다. SEA는 이를 통해 인수대금 80억달러(약 9조3300억원)를 전액 현금으로 지불하고 지분 100%를 매입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올 상반기 본사가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1조9000억원을 빌리고 해외자회사로부터 22조원 넘는 배당을 끌어온 것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본사 곳간이 바닥을 드러낸 탓이다. 현금보유량이 급격히 줄게 된 터닝포인트는 2021년 초반에 지급된 대규모 특별배당이 꼽히고 있다.
2016년 말 삼성전자의 별도기준 현금성자산(단기금융상품 포함)은 33조9490억원이었다. 이 가운데 하만 인수에 들어간 80억달러가 빠진 이후 어느 정도 등락이 있다가 2020년 말 별도기준 현금성자산은 30조원까지 회복됐다.
그러나 2020년도 결산배당에다 특별배당이 더해지면서 이듬해 초에 20조원 넘는 돈이 본사 곳간에서 빠져나갔다. 현금성자산은 18조원으로 급감한 가운데 지난 2년간 20조~30조원 넘는 설비투자(CAPEX) 등으로 현금이 소요됐다. 작년 하반기부터 반도체 불황이 겹치면서 영업활동현금흐름 유입규모가 대폭 감소하자 곳간이 비게 된 것이다.
◇예상 못한 급격한 반도체 다운턴이 결정타 2020년도 결산배당에 특별배당이 추가된 것은 여러 요인이 중첩된 결과다. 삼성전자는 3개년 주주환원계획을 발표하고 이에 맞춰 배당 및 자사주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 당시에 2018~2020년 환원계획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주주정책을 발표하는 시기였다.
또 2020년 10월 이건희 회장의 타계로 유가족들의 상속세 이슈가 부각되던 시기였다. 12조원을 웃도는 상속세를 납부하기 위해 총수일가는 지분매각과 주식담보대출 등으로 현금을 마련해야 했다. 당연히 배당을 통한 재원 확보도 필요했다.
시장의 분위기도 일조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116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으나 하만 이후 대규모 인수합병(M&A)에 나서지 않았다. 반도체 설계자산 업체 ARM이나 차량용 반도체 기업 NXP의 인수설 등 각종 풍문이 돌았지만 구체화된 것은 없었다. 이에 여유자금을 주주환원에 쓰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업황도 좋았다. 그때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억눌렸던 수요가 급등하면서 반도체 시장이 업턴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2021년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은 732억달러(90조원)로 인텔(725억달러)을 제치고 3년 만에 글로벌 1위 탈환에 성공했다.
그때만 해도 반도체 공급부족(쇼티지)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될 만큼 호황이 점쳐졌다. 호경기가 예상된 만큼 긴축경영 등을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국금리의 급격한 인상 등으로 지금 같은 전 세계적인 반도체 침체를 예상치 못했던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