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자회사로부터 차입과 배당 등으로 44조원에 가까운 거금을 끌어온 이유는 시설투자(CAPEX) 때문이다. 삼성전자 연간 CAPEX의 90% 이상이 반도체에 투입된다.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인 반도체 특성상 국내에만 연간 30조~40조원의 현금이 투입되고 이에 따른 감가상각 규모도 수십조원을 가볍게 넘는다.
시장에서의 초격차 확보, 호황기에 대비한 생산능력(캐파) 확대와 파운드리(위탁생산) 등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반도체 사업자로서의 숙명이기도 하다. 종속회사들로부터 수십조원을 끌어오는 초유의 결정에는 이 같은 비즈니스 특성이 자리하고 있다.
◇삼성, 반도체에 매년 수십조원 쏟는 이유 반도체 생산라인에는 고도의 기술력과 값비싼 장비들이 대거 투입된다. 가령 초미세공정에 쓰이는 극자외선(EUV) 노광장치의 경우 1대당 2000억~3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 수십억원, 수백억원대 고가장비들이 사용되는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당연히 CAPEX로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이는 반도체 산업의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
삼성전자도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1위, 파운드리 2위 위상을 유지하고 더 성장하기 위해 해마다 방대한 CAPEX를 투입하고 있다.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53조원, 별도기준으로 42조원을 설비투자에 쏟았다. 즉 반도체 사업은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더 크게 뽑아먹는 구조다.
대규모 CAPEX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상각비(감가상각비+무형자산상각비)로 이어진다. 설비사용에 따른 가치 마모를 회계상으로 반영하는 감가상각비 등이 지난해 연결기준 39조1076억원, 별도기준 26조9170억원 발생했다. 이론상으로는 기존 설비의 보수 및 유지에만 매년 이 정도 CAPEX를 들여야 한다는 의미다. 캐파 확대를 위한 증설을 감안하면 이보다 더 많은 돈이 설비투자에 투입돼야 한다.
때문에 삼성전자의 CAPEX는 최근 수년간 연결·별도 모두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별도기준 CAPEX는 2019년 20조였던 규모가 지난해 42조원을 넘었다. 시설투자의 90% 이상이 반도체에 투입된다. 평택캠퍼스에 건설 중인 3·4공장(P3·P4)과 EUV 장치 구매 등으로 인해 지출규모가 계속 늘었다.
◇투자수요 늘어나는데 배당 외 실제 영업현금 마이너스 이는 본사 곳간에 그만큼의 현금이 빠진다는 뜻이다. 2021년 초반 특별배당 등으로 20조원 이상을 지출한 후 CAPEX로만 매년 30조~40조원이 투입됐다. 2020년 말 30조원 규모였던 본사의 현금성자산만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반도체 호황기라면 막대한 영업활동현금흐름 유입으로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으나 작년 하반기부터 불황기에 접어들었다.
올 상반기 삼성전자의 DX(가전·스마트폰)부문의 영업이익은 8조381억원, 그러나 DS(반도체)부문이 8조9437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별도기준으로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별도기준 영업현금흐름은 17조6427억원 순유입(+)이지만 이는 22조원의 배당금 수입이 반영된 결과다. 순수 본업의 현금흐름은 순유출(-) 상태다.
이런 가운데 6월 말 별도기준 CAPEX는 26조원으로 전년 동기(17조6219억원)대비 오히려 늘었다. 올해는 반도체 불황 타개를 위한 감산이 진행되고 있으나 향후 경쟁력 목적의 신규투자는 멈추지 않았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산업은 불황 때 캐파를 줄였다가 호황에 접어들 때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경우 시장 경쟁에서 뒤쳐진다"며 "자본력이 충분하다면 오히려 불황기 때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 호황기로 돌아서면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을 쓸 만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연간 별도기준 26조원에 이르는 감가상각을 커버하고 호황기에 대응하려면 수십조원 규모의 시설투자를 멈출 수 없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 21조9000억원 차입을 하고 해외자회사로부터 22조원 규모 배당을 챙긴 것도 이런 투자재원을 마련키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