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주 마법'은 다소 철 지났다. 승계의 묘책이라 부르기엔 이제 수가 읽히는 방법이다. 2000년대 들어 지배력 확대를 위해 자사주를 이용한 케이스는 여든 건이 넘는다. 눈총이 따갑긴 해도 미련을 버리기엔 열매가 달다.
관건은 다음 세대로의 지배력 이전에 있다. 지분율은 높여 뒀는데, 덩달아 불어난 세금 부담을 줄일 길은 없을까. 최근 지주사 역합병을 결정한 삼표그룹의 케이스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지분율 내렸지만…지배력 'UP' 삼표그룹이 지주사 체제를 구축한 것은 2013년 11월이다. 삼표를 지주회사(삼표)와 사업회사(삼표산업)로 물적분할했다. 정도원 회장이 지배하는 삼표가 지배구조의 정점에서 삼표산업을 거느리는 형태가 이때 만들어졌다. 당시 업계서는 아들 정대현 삼표시멘트 사장이 대원(현 에스피네이처) 등 계열사 지분을 삼표에 현물출자하고, 대신 삼표 지분을 받는 승계 시나리오를 점쳤다.
하지만 삼표는 최근 삼표산업과 삼표의 흡수합병을 발표했다. 자회사인 삼표산업이 모회사 삼표를 삼키는 역합병이다. 합병기일은 7월 1일, 회사 측에선 결합을 통한 시너지 효과를 목적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더 눈에 띄는 것은 지분 변화다.
역합병 거래는 자기주식을 대량으로 낳는다. 현재 삼표는 삼표산업 주식 1025만351주(82.78%)를 보유 중이며 이 주식은 합병이 이뤄지면 삼표의 자사주로 바뀐다. 삼표 주식 1주당 삼표산업 주식 1.87주가 교부되는 합병비율을 적용해보면 합병신주는 약 1053만주, 합병후 삼표산업의 주식총수는 약 2097주다. 자사주 규모가 합병 후 삼표산업 지분의 48.89%에 이를 전망이다.
절반이 자사주로 채워졌으니 오너일가 지분율은 당연히 축소됐다. 정도원 회장은 65.99%에서 33.15%, 아들 정대현 사장은 11.34%에서 5.70%로 낮아졌다. 에스피네이처를 포함할 경우 정 사장의 영향 아래 있는 지분은 합병 전 30.77%, 합병 뒤엔 16.33%로 계산된다. 에스피네이처는 정 사장이 보통주 기준 71.95%를 보유한 가족회사다.
그러나 이런 지분율 감소는 착시에 불과할 뿐이다. 자기주식은 상법상 의결권이 없기 때문이다. 주식총수에서 자사주를 제외한 실질 지배력을 셈하면 정도원 회장이 64.86%, 에스피네이처와 정대현 사장 보유분을 합쳐 31.95%다. 소폭이긴 해도 합병 전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지분율이 깎였으나 지배력은 지켰고, 대규모 자사주를 덤으로 얻었다. 새로운 방식의 자사주 마법이다.
◇'NEW' 자사주 마법? 정대현의 와일드카드 이 자사주는 앞으로 정 사장의 지배력 확대에 핵심 열쇠가 될 수 있다. 역합병 없이 부친의 삼표 주식을 그대로 넘겨받는 형태라면 세금 부담을 감당하기 힘들다. 비상장주식을 최대주주로부터 상속 또는 증여받는 경우 기본 상속세율 50%(30억원 초과분)에 할증까지 붙어 최대 65%까지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사주 카드'를 얻은 정 사장은 이제 아버지 지분을 상속받지 않거나, 상속분을 최소화하면서도 회사를 지배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죽어 있는 자사주를 다시 살리면 된다. 가령 SPC(특수목적법인) 등을 세워 삼표산업 아래에 두고 교환사채(EB)를 발행해 자사주로 상환하는 방법이 있다. 이 경우 자사주는 의결권이 생기고 정 사장이 되사오면 상속증여세 이슈와 무관한 거래가 된다.
혹은 OCI와 금호석유화학 사례처럼 자사주를 다른 기업 주식과 스와프, 의결권 있는 우호지분으로 바꾸는 선택지가 있다. 삼표산업을 다시 인적분할하는 것도 이론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기로의 지주사 체제, 가업승계 '참고 답안' 삼표산업의 역합병은 승계 전략을 고민 중인 지주체제 기업집단들이 유심히 지켜볼 만한 케이스로 여겨진다. 국내 기업집단들은 추세적으로 순환출자 구조에서 지주회사 구조로 변화했다. 정부가 순환출자 해소를 위한 당근책으로 지주사 전환에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서 가업승계와 지배력 수성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고민이 남았다.
지주사 전환 당시 부여된 과세이연 혜택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조세특례제한법(조특법)에 따라 지주사를 세우는 과정에서 주식을 현물출자하고 지주사 지분을 받은 경우, 여기서 발생한 차익에 대해선 양도소득세 또는 법인세를 미룰 수 있다. 이 주식을 처분하는 시점까지 과세가 무기한 이연된다는 점에서 사실상 현금지출 없는 지배력 확대 효과가 생긴다. 일몰기한이 연장됐기 때문에 올해 말까지 지주사로 전환하는 기업들엔 모두 적용되는 특례다.
그러나 과세이연 중단사유인 '처분'이 일어나면 미뤄놨던 양도세를 내야한다. 문제는 상속 또는 증여가 처분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애초 조특법은 중단 사유로 '증여 또는 상속'을 명시하고 있다가 2010년 개정으로 삭제했다. 당시 세법 개정안을 제안한 기획재정부는 입법취지를 "처분에 포함"되기 때문으로 설명했는데 법원은 반대로 판단했다. 2019년 말 삼양그룹의 양도세 취소소송에서 서울행정법원은 상속했을뿐 양도는 없었다는 이유로 과세이연이 계속돼야 한다고 봤다.
다만 하급심 판례인 데다 입법취지와 맞지 않는 결정인 만큼 추후 얼마든지 다툼의 여지가 있다. 미뤄둔 양도세가 있는 기업들로선 무시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다. 삼표그룹 역시 지주사 전환 당시에 정도원 회장이 삼표정보시스템 주식(75%)을 현물출자해 삼표 주식을 받으면서 과세이연 혜택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