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 구성은 조직 목표를 가늠하는 척도다. 따라서 이사회 변화는 기업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가리킨다. 가령 기술력이 부족하다거나, 마케팅을 더 잘하고 싶다거나, 재무구조 안정화가 필요하다면 해당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을 회사 안팎에서 찾아 등용해 변화를 준다. 특히 최대주주가 바뀐 기업의 이사회에서 이러한 변화가 잦다.
반면 지난해 8월 자율주행 스타트업 '포티투닷(42dot)'을 인수한 현대자동차그룹은 기존 안효석 현대차 회계관리실장(상무)을 감사 임원에 올렸을 뿐 송창현 대표이사를 포함한 3명의 이사진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포티투닷에 필요한 건 최고 의사결정자 교체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기존 이사진에 높은 신뢰를 나타낸 셈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포티투닷 이사진 면면은 연령과 경력 면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미래기술 관련 행사 때마다 함께 등장하는 송 대표는 1968년생으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IT 기업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이후 네이버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거쳐 네이버 연구개발 전문 자회사인 네이버랩스 설립을 주도했다.
특히 송 대표가 네이버랩스 대표로 재직하는 동안 국내 최대 규모의 개발자 컨퍼런스 주최를 주도하고 국내외 유망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이끈 데 이어 제록스리서치센터유럽(프랑스에 있는 첨단기술연구센터) 인수에 기여한 점 등은 높은 평가를 받는 점들이다.
2021년 4월 송 대표가 현대차 사장으로 임명되고 나서 불과 6개월 만에 현대차그룹이 처음으로 'HMG 개발자 컨퍼런스'를 개최한 점을 비추어보면, 정의선 회장이 송 대표에게 기대하는 바가 자율주행 기술 고도화뿐만은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송 대표는 2021년과 2022년에 모두 키노트 발표자로 참석해 HMG 개발자 컨퍼런스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포티투닷 이사회에서 송 대표 옆에 있는 정성균 사내이사와 최진희 사내이사의 경력도 눈에 띈다. 정 사내이사는 1984년생으로 이사진 가운데 가장 연하이지만 고려대와 프랑스 꼬뜨 다쥬흐대학원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다. 이후 프랑스 국립 연구소와 미국 퀄컴, 네이버랩스 등에서 컴퓨터 시각 데이터 처리와 자율주행차, 머신러닝 등을 연구했다.
2019년 네이버랩스 선배이자 대표인 송 대표와 함께 퇴사해 포티투닷(당시 사명은 코드나인) 창업에 기여했다. 가장 최전선에 있는 기술을 발굴하고 개발하기보다는 고객들에게 이로운 대중적인 기술을 발굴하고 최적화하는 데 관심이 크다는 평가다. 2020년부터 자율주행엔지니어링 그룹을 리드하고 있으며 사내이사에는 2021년 선임됐다.
최진희 사내이사는 이사진 가운데 가장 늦은 2022년 3월 부대표로 합류했다. 나이는 송 대표와 정 이사의 중간인 46세(1977년생)로 고려대에서 컴퓨터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2006년부터 2022년까지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다. 2010년대 초중반 삼성전자와 인텔, 리눅스 등이 참여하는 '스마트 기기 운영체제' 개발 프로젝트에 리더로 참여했다.
최 부대표의 강점은 흔치 않은 '풀 스택(Full-Stack)' 엔지니어라는 점이다. 프론트엔드부터 백엔드까지, 즉 서버와 클라이언트 측에서 모두 작업을 할 수 있는 개발자다. 포티투닷이 2년 전 사업목적으로 추가한 반도체 개발에도 일가견이 있다. 자율주행 기술력을 빠르게 고도화해 상용화하려는 포티투닷엔 딱 필요한 인물이라는 평가다.
물론 이사진 이력만 눈을 사로잡는 건 아니다. 포티투닷은 예정대로 지난해 11월 서울 광화문 과장과 인접한 청계천 일대에서 자율주행 서비스를 시작했다. 서울 상암동에서 유상 운송(요금을 받아 운행)을 시작한 지 약 1년 만에 도심으로 진출하는 성과를 냈다. 더 좁고 복잡한 도로, 더 많은 인파 속에서도 자율주행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점을 보여줬다.
이러한 결과들은 정의선 회장이 송창현 대표를 포함한 기존 이사진에 변화를 주지 않고 무한 신뢰를 보내는 이유로 풀이된다. 정 회장은 지난해 연말 임원 인사에서 그간 촉망받던 자율주행 사업 관련 젊은 임원들을 대거 내보내며 송 대표와 포티투닷에 힘을 실어주는 결정을 했다. 여기에 더해 앞으로 3년간 총 1조540억원을 포티투닷에 출자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이사진에 변화를 주지 않고 신뢰를 보인 점, 그룹 자율주행 역량을 포티투닷에 집중시킨 점, 그리고 이번 1조원 넘는 자금 수혈 등은 정 회장이 포티투닷을 전면에 내세워 글로벌 완성차 및 빅테크사들과의 자율주행 기술 경쟁에서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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