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 프레셔(Peer Pressure)’란 사회적 동물이라면 벗어날 수 없는 무형의 압력이다. 무리마다 존재하는 암묵적 룰이 행위와 가치판단을 지배한다. 기업의 세계는 어떨까. 동일업종 기업들은 보다 실리적 이유에서 비슷한 행동양식을 공유한다. 사업 양태가 대동소이하니 같은 매크로 이슈에 영향을 받고 고객 풀 역시 겹친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태생부터 지배구조, 투자와 재무전략까지. 기업의 경쟁력을 가르는 차이를 THE CFO가 들여다본다.
스피드 스케이팅(Speed Skating)은 출발선에 서는 경쟁자의 유무(有無)가 중요하다. 강력한 우승 후보라도 상대 선수의 실격 등으로 혼자 경기를 치르면 좋지 못한 기록을 세우는 일이 종종 있다. 우승을 위해서는 모든 선수 중 가장 빨라야하는 만큼 대진 상대는 우승을 향한 라이벌이자 동료다.
국내 화장품 ODM(제조자 개발생산) 시장에도 선의의 경쟁에 기반한 라이벌 기업이 있다. 바로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다. 1992년 후발주자인 코스맥스가 설립된 이후 약 31년간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이고 있다. 현재는 미국과 중국, 중동 등까지 진출하며 격전지를 넓히고 있다.
두 회사의 인연은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를 창립한 윤동한 회장과 이경수 회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윤 회장과 이 회장은 과거 대웅제약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1981년 이 회장이 대웅제약에 입사하며 이들은 한 직장을 다니게 됐다. 1974년부터 대웅제약에서 근무한 윤 회장이 옛 직장 선배다. 두 인사 모두 승진이 빠른 편이었으며 윤 회장은 부사장으로, 이 회장은 전무로 대웅제약을 나와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를 설립했다.
◇한국콜마 '데드라인 3년'의 도전
윤 회장은 국내 화장품 ODM 시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당시 한국 화장품 시장은 한 기업이 제조부터 마케팅까지 맡는 구조였던 만큼 제조와 유통이 분리된 선진국의 시스템을 도입해 기업을 설립하면 승산이 있겠다고 판단했다. 일본콜마로부터 지분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한 그는 1990년 충남 연기군의 5평짜리 공장에 한국콜마를 설립했다.
사업 초기 윤 회장은 '데드라인(Deadline)'을 3년으로 잡았다. 회사를 지속 성장이 가능한 기업으로 만들기 위한 목표였다. 전기료를 납부하지 못해 단전 예정 통보를 받을 만큼 힘든 시기였지만 제품 개발에 역량을 모았다. 그 결과 국내 최초로 투웨이케이크(two way cake)를 만들게 됐다. 피부의 결점을 가려 주고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진 고형의 화장품인 투웨이케이크의 상용화는 성장을 위한 토대가 됐다.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을 넘어 ODM 사업이 활성화되던 시기에는 LG생활건강과 아모레퍼시픽 등 국내 대기업과 거래를 하면서 외연을 키웠다. 1990년대 후반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도 연평균 20% 수준의 성장을 유지했다. 2000년대 미샤와 더페이스샵과 같은 브랜드숍의 등장도 한국콜마의 성장에 힘을 보탰다. 이는 2002년 코스피 상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국콜마는 2012년 지주사인 한국콜마홀딩스와 분할된 이후 M&A(인수합병)와 해외법인 설립, R&D(연구개발)센터 준공 등을 단행하며 사업 다각화를 위한 채비에 나섰다. 2016년의 경우 미국과 캐나다 화장품 ODM 기업을 연달아 인수했다. 2018년에는 HK이노엔(옛 CJ헬스케어)를 흡수하며 제약과 HB&B 부문의 경쟁력을 강화했다.
지난해의 경우 글로벌 화장품 패키징 전문 기업인 연우를 인수하며 사업 다각화에 힘을 보탰다. 한국콜마는 연우의 지분 55%를 확보하기 위해 2814억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했다. 연우는 국내 화장품 용기 시장 점유율 선두 기업으로 화장품용 디스펜서 펌프를 처음으로 국산화한 게 특징이다. 한국콜마는 연우 인수로 화장품 사업의 밸류체인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된 만큼 중장기적으로는 친환경 용기 화장품 시장의 주도권을 공고히 할 방침이다.
◇후발주자 코스맥스 'R&I·글로벌' 공략
이 회장은 코스맥스가 후발주자(1992년 설립)였던 만큼 초창기부터 기술개발에 역량을 모았다. 코스맥스의 전신이 한국 미롯토였던 것 역시 일본 화장품 ODM 기업 미롯토와 기술제휴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향후 코스맥스가 R&D 조직을 갖추려고 할 때 미롯토의 압박도 거셌지만 이 회장의 기술력 확보 의지는 꺾지 못했다.
1994년 이 회장은 기술제휴를 청산했다. 동시에 사명을 한국 미롯토에서 코스맥스로 변경하며 본격적으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코스맥스는 품질과 기술을 중심으로 한 전략에 집중했다. 1997년 기업부설 중앙연구소를 인가받는 한편 우수화장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인 CGMP를 식약처로부터 획득하기도 했다.
코스맥스는 기술력을 앞세워 한국콜마 못지않은 시장 지배력을 갖추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에 급성장하기 시작한 미샤와 더에피스샵 등의 브랜드숍의 성장과 궤를 함께하며 화장품 ODM으로의 입지를 다졌다. 국내 시장에서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해외 진출로 이어졌다. 2004년에는 한국 ODM기업으로는 최초로 중국 상해에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외형 확대를 지속했다.
코스맥스는 중국을 시작으로 글로벌 영토 확장에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콜마가 미국콜마와 일본콜마 등의 영향으로 해외 진출이 더디다는 점을 공략했다. 미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 현지 법인과 생산 공장을 짓기 시작했고 이는 국내 화장품 ODM의 원조인 한국콜마보다 한발 앞선 성과였다.
비슷한 시기에 코스맥스는 각 분야별 전문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화성 소재의 중앙연구소를 판교로 이전하며 '코스맥스 기술연구원(R&I Center)'으로 확대 개편했다. 코스맥스는 R&I 센터를 중심으로 중국 등 해외 R&I 센터들과 협업해 현지에 최적화된 제품을 연구·개발하고 있다. 전 세계 코스맥스 R&I 센터에 근무하는 연구원은 약 500명으로 전체 직원의 1/3을 넘는 비율이다. 이중 정직원의 비중은 30%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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