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만해도 국내에서 행동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은 '벌처 펀드(vulture fund)'라는 한 단어로 요약됐다. 죽은 동물의 고기를 뜯어 먹는 대머리독수리(vulture)의 식성을 따온 표현으로 말 그대로 이윤을 남기기 위해 인정사정없이 기업을 공격하고 떠나는 전략을 일컫는다.
최근 행동주의에 대한 시장의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 정부의 밸류업 정책 바람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기대감이 맞물리면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어느때보다 활발해졌다. 아직까지는 밸류업이냐, 기업가치의 장기적 하락이냐를 두고 평가가 엇갈린다. 분명한 것은 행동주의가 행동개시에 나섰고 기업은 그를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비를 위해서는 국내 행동주의가 어떤 배경으로 성장해 왔고 왜 지난해와 올해가 분수령이 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국내 행동주의는 왜 지금 기지개를 켰고, 기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엘리엇'이 남긴 첫 인상,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맥 못춘 행동주의
국내 투자자들에게 아직 행동주의라는 개념이 생소하던 때 외국 행동주의 펀드들이 첫 인상을 굳혔다. 타이거 펀드나 소버린 등의 선례도 있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가 대표적이다.
엘리엇은 2015년과 2018년 삼성물산과 현대차그룹을 연달아 공격했다. 명분은 있었지만 과거 아르헨티나를 파산에까지 이르게할 만큼 실익을 위해서는 피도 눈물도 없었던 곳이 엘리엇이다. 자연스럽게 국내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를 곧 국내 회사의 경영 활동에 어깃장을 놓는 해외 자본쯤으로 평가했다.
이후 한국형 행동주의로 강성부 펀드(KCGI)가 출격했다. 국내에서 행동주의를 가장 널리 알린 사건은 KCGI의 한진칼 투자다. 마찬가지로 행동주의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꾸지 못했다. KCGI는 한진칼의 지분을 사들이면서 경영권 분쟁에 직접 뛰어드는 한편 지배구조 개선 등의 주주제안을 펼쳤다. 국내 투자자들은 '행동주의는 곧 공격형'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부정적인 시각만큼 국내에서는 행동주의가 맥을 못췄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도입된 지 여러해가 지났던 2020년에도 주주 행동주의의 타깃이 된 기업이 한해 10곳 이하였을 정도다. 일부 행동주의 펀드가 몇 차례 총대를 맸지만 개별 사례에 그쳤다. 소액주주가 의결권을 위해 결집하는 방식도 마땅치 않았고 경험도 드물었다.
국내 증시만의 특성도 한 몫을 했다. 코리안 디스카운트가 지속되면서 행동주의 펀드들의 성과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못했다. 수익률이 오른 펀드는 당연히 있었지만 포트폴리오를 뜯어보면 저평가된 가치주와 오를법한 카테고리, 국내 장에서 안정적인 종목들을 바스켓에 담은 상품이 많다. 주주환원 정책이나 기업가치 제고보다는 단기 이벤트로 주가가 오르내리는 경향이 강했다.
그랬던 한국형 행동주의가 지난해부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동안 행동주의의 영향을 덜 받았던 기업들이 변화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다.
◇스튜어드십 코드, 행동주의 출발점…밸류업 정책에 기세 올랐다
국내 행동주의 펀드들의 움직임은 지난해와 올해 활발해졌지만 몇년 간의 빌드업을 거친 결과다. 올해 3월 행동개시에 나서기 전까지 시장에서는 규정을 손봤고 펀드는 지분을 매집했다.
전문가들은 2016년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주주제안이 늘어나게 된 출발점으로 본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9월 발간한 주주 행동주의 펀드 관련 보고서에서 2016년 스튜어드십코드 제정 전 국내 활동은 외국계 펀드들이 전담해 왔다고 봤다.
스튜어드십 코드 제도가 도입되고 2020년 12월 감사위원 분리선출과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등의 내용이 상법 개정을 통해 제도화되면서 발판이 마련됐다는 분석이다.
올해는 특히 행동주의 펀드들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 밸류업 정책을 내놨기 때문이다. 세계 주요국 증시 지수 중 PBR이 1을 밑도는 지표는 코스피가 유일하다는 진단에 따랐다.
기업이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스스로 세워 공시하라는 게 골자다. 소액주주 권익 보호를 위한 상법도 바꾼다. 스튜어드십 코드도 개정하기로 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에게 명분이 생겼다는 의미다. 저PBR 종목 편입 비중이 높은 행동주의 펀드의 특성상 수익률도 나쁘지 않은 때다. 연초에는 외인들도 몰려 수익률을 밀어올렸다.
◇'역대급' 주주행동…주주환원·경영권 분쟁에 부담 높아진 기업들
그만큼 기업들의 긴장감도 어느때보다 높아졌다. 영국 런던 소재 글로벌 기업 거버넌스 리서치업체 딜리전트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한국에서 공개 주주서한을 받는 등으로 행동주의의 타겟이 된 기업은 2020년만 해도 10곳에 불과했다. 2021년 27곳, 2022년 49곳, 2023년 77곳으로 늘었다.
주주행동 캠페인으로 치면 숫자가 더 많다. 주총 개최가 집중되는 상반기로 보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행동주의가 많았던 나라로 꼽혔다. 올해는 당장 3월 첫 정기 주주총회 시즌부터 시끌벅적하다. 삼성물산과 KT&G·삼양그룹·현대엘리베이터·7대 금융지주 등이 대상이 됐다.
삼성물산은 글로벌 펀드인 시티오브런던, 화이트박스어드바이저스와 한국계 안다자산운용 등 다섯 곳의 행동주의 펀드 연합으로부터 올해 약 1조2000억원 규모의 주주환원 정책을 마련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들의 삼성물산 지분율은 1.46%다.
삼성물산은 펀드들의 요구가 경영상 부담되는 수준이라고 반박했다. 삼성물산은 공시를 통해 "2023년 뿐 아니라 2024년 회사의 잉여현금흐름 100%를 초과하는 금액"이라며 "이런 규모의 현금 유출이 이뤄진다면 회사는 미래 성장동력 확보 및 사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자체 투자재원을 확보하기가 어렵게 된다"고 답했다.
주주행동에 나선 운용사들의 지분은 대체로 주주총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준은 아니다. 결과를 가르지는 못하겠지만 기업으로서는 무시하기 어렵다. 오너 일가와 협업해 위협적인 의결권이나 지분으로 승부를 건 곳도 있다.
올해 주주총회에서는 금호석유화학이, 이보다 앞선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는 한국앤컴퍼니가 대표적인 예다. 결국 기업들도 방어 수단에 만전을 다해야할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