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크와 HMM은 규모가 다를뿐 재무전략에선 최근 몇년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였다. 불황기 차입이 급증하는 흐름을 나타내다가 코로나19 이후 황금기가 찾아오자 적극적인 디레버리징(Deleveraging)을 감행했다. 머스크의 경우 3년간 45억달러를 빚 갚는 데 썼다.
하지만 해운업 대호황의 종료와 함께 부채를 감축할 동력도 힘을 잃고 있다. 더군다나 매각이 진행 중인 HMM은 이제 새 주인의 인수금융 부담까지 걱정야할 처지다.
◇공격적 차입 감축, 순현금만 126억달러 해운업이 기록적 침체를 마주한 2016년, 머스크 재무재표에도 불황이 그대로 드러났다. 전년 말 78억달러였던 순차입금(NIBD)이 1년 만에 107억달러로 가파르게 뛰었다. EBITDA가 90억달러에서 69억달러 수준으로 급감한 와중에 스페인 해운그룹 TCB 인수, 아프리카 오일(Africa Oil) 지분매입 등 투자활동에 52억달러라는 거금이 나갔기 때문이다. 자사주 매입과 TCB에서 딸려온 부채 등으로도 28억달러 규모의 차입이 추가됐다.
차입 증가세는 이듬해도 이어졌다. 독일 컨테이너선사인 함부르크 수드(Hamburg Süd) 인수에 42억달러를 쓴 영향이 컸으며 2017년 말 머스크의 순차입금은 149억달러까지 더 치솟았다. 2년새 두배 가까이 늘어난 꼴이다.
재무 개선 필요성을 절감한 머스크는 2018년 사업부 매각과 분할 등 구조조정에 나선다. 보유 중이던 프랑스 토탈(TotalEnergies) 지분 일부를 팔아 30억달러를 확보했고, 머스크 오일 매각과 머스크 드릴링 분할 작업을 통해서도 32억달러가 추가로 들어왔다.
덕분에 2018년 순차입금은 87억달러 수준으로 크게 감축됐지만 개선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2019년 새로운 리스 회계기준서인 IFRS16이 도입되면서 순식간에 62억달러의 부채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남아 있는 토탈 지분을 매각해 26억달러를 확보하는 등 어떻게든 순차입금 규모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2019년 말 순차입금이 다시 117억달러로 확대됐다.
디레버리징 작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은 2020년이다. 재난인 줄 알았던 코로나가 뜻밖의 호황을 가져왔고, 머스크는 차환없이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잉여현금흐름을 창출하기 시작한다. 그 해 잉여현금흐름이 46억달러를 기록하면서 차입금 18억6000만달러를 순상환했다. 2021년에는 이보다 많은 19억3400만달러, 2022년에는 약 7억1700만달러를 차례로 갚았다.
덕분에 2020년 순차입금은 92억달러로 줄었고 2021년에는 마이너스(-) 15억달러를 기록해 순현금 상태로 바뀌었다. 지난해의 경우 무려 110억달러의 순차입이 줄기도 했다. 2022년 연말 순현금 규모는 126억달러. 한화로 17조원에 달해 곳간이 그야말로 차고 넘쳤다.
◇약해지는 현금창출력…"비용 효율화 포커스" 하지만 현금을 쌓아 차입을 갚을 여력이 이제 떨어져가고 있다. 코로나 이후 급증했던 해상 운송량이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고 운임도 추세적인 우하향을 나타내는 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머스크는 올해 상반기 EBITDA가 69억달러에 불과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같은 기간 크게 웃돈 수치지만 2022년과 비교했을 땐 무려 65%가 쪼그라들었다.
올 상반기 머스크의 차입금 순상환 규모도 2억6200만달러에 머물렀다. 지난해 상반기엔 6억달러 넘게 갚았는데 그 절반에 못미친다. 상환해야할 차입금 자체가 줄기도 했으나 현금창출력이 약해진 영향도 있다.
순현금 규모를 보면 올 상반기 기준 71억달러로 지난해 말보다 50억달러 이상 축소됐다. 구체적으로 현재 현금성자산은 221억달러, 총부채(Total gross debt)는 151억달러다. 부채의 70% 이상을 리스(110억달러)가 차지하고 있다.
머스크의 패트릭 제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상반기 컨퍼런스콜을 통해 "올해 MSS(Maersk Supply Service) 매각에 따른 현금 유입, 제한적인 CAPEX(설비투자) 등으로 70억 달러 규모의 순현금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었다"며 "향후 평균 운임은 더 하락할 것으로 예상되며 비용과 운영 효율화에 더 포커스를 둬야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비용 절감에 대한 의지와 별개로 업황 침체에 따른 현금흐름 타격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HMM 매각, 대규모 배당으로 이어질까 HMM 역시 전반적인 흐름은 머스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경영난에 산업은행 자회사로 편입된 2016년 순차입금이 2조원을 넘겼다. 또 새 회계기준 도입으로 리스부채가 차입에 포함되기 시작한 2019년에는 약 4조6000억원으로 재차 뛰었다. 그러다 2021년 돌연 순현금(6418억원) 전환한다. 차입 규모엔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지만 현금성자산이 2년간 6조원 가까이 늘었기 때문이다.
이후 HMM이 쌓인 현금으로 차입 부담 줄이기에 나서면서 총차입금 규모는 2020년 6조원 수준에서 올해 상반기 3조8909억원으로 축소됐다. 대부분(3조4123억원) 리스부채이기 때문에 사실상 차입이 거의 없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6월 말 기준 12조5000억원을 넘는 현금성자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순현금 규모를 셈하면 8조6516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제 HMM은 머스크보다 한층 쉽지 않은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업황이 나빠지는 것은 두 회사 모두 마찬가지인데 HMM은 설상가상 매각까지 추진 중이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딜이 성사될 경우 인수금융 부담이 HMM에 전가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인수기업 또는 재무적투자자(FI)가 대규모 배당을 받는 형태로 HMM 현금을 빼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HMM 인수 3파전을 벌이고 있는 하림그룹, LX그룹, 동원그룹은 모두 자금 동원력에 대한 회의적 시선을 받고 있다. HMM 몸값이 5조~최대 7조원으로 예상되는데 올 상반기 말 기준 하림지주와 LX인터내셔널, 동원산업의 현금성자산(단기금융상품 포함)은 연결 기준으로 각각 1조6573억원, 1조2714억원, 6318억원에 그친다. 3조~5조원을 차입한다고 가정할 경우 매년 이자로만 2000억원에서 4000억원에 육박하는 돈이 나갈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업황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배당으로 거금이 나간다면 차입축소 기조를 이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라며 "향후 HMM 재무 안정성은 인수기업의 자금조달 구조가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