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진 명예회장이 돌아왔다. 2020년 주총장에서 '65세 룰'을 어기면 '왕'이란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던 그가 2021년 은퇴하고 2년만에 66세의 나이로 이사회 의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각사 경영진의 요청에 따른 결정이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는 데 주목된다.
셀트리온그룹은 '현 상황을 고려한 결단'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글로벌 여건이 녹록치 않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셀트리온그룹이 여러가지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의사결정이라는 얘기다. 연구개발(R&D)에선 신약, 지배구조에선 3사 합병 등 굵직한 이슈 앞에 섰다. 제 2의 셀트리온그룹으로 도약하느냐를 앞두고 서 명예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2021년 3월 은퇴 당시 긴급상황 시 '소방수' 복귀 예고서 명예회장의 복귀 소식이 업계에 퍼진 건 한달여 전부터다.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기점으로 경영복귀 등 결단을 내릴 거라는 의견이 제기됐다. 이미 그의 복귀를 위한 사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구체적인 설(說)도 파다했다. 궁극적으로 셀트리온그룹의 굵직한 현안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위기의식' 속에서 말들이 퍼져나갔다.
공식적으로 그가 은퇴한 건 2021년 3월이다. 당시 그가 총대를 메고 진행했던 렉키로나주(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이 마무리 된 시점이었다. '백신' 중심의 신약개발에 뛰어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면서도 은퇴 의사는 번복하지 않았다. 다만 은퇴 이후라도 하더라도 셀트리온그룹에 긴급상황이 생길 시 '소방수' 역할로 나서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공동의장'이라는 분명한 듯 다소 애매한 권한으로 경영복귀한 것도 지금 셀트리온그룹이 '긴급상황'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서 명예회장은 지주사부터 상장 3사의 이사회에서 사내이사로서 장남인 서진석 의장과 함께 공동의장 역할을 맡게 된다. 서 의장과 함께 동일한 권한의 핵심 의사결정자가 된 셈이다.
◇코로나19 치료제·백신개발 '좌초'…성장동력 시장 '지지' 실패셀트리온그룹은 현재 세가지 과제가 산적해 있다. 우선 본업인 바이오시밀러 사업에서 정체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셀트리온은 국내 바이오시밀러 1호 회사로 2000년대 들어 고속성장을 이뤘다가 2020년부터 성장 정체에 접어들었다.
셀트리온은 2008년 오알켐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우회상장한 후 2018년 코스피로 이전상장했다. 코스닥 시장에 상장할 당시 매출은 840억원, 코스피 상장 시점엔 8600억원으로 10배 성장을 이뤘다.
류머티즘관절염 바이오시밀러 '렘시마'부터 시작해 허쥬마(허셉틴 바이오시밀러), 트룩시마(리툭산 바이오시밀러), 렘시마SC, 유플라이마(휴미라 바이오시밀러), 베그젤마(아바스틴 바이오시밀러) 등 모두 항체(Antibody) 바이오의약품 시밀러를 주력으로 내놨다.
하지만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후발주자로 수많은 신규 플레이어들이 바이오시밀러 시장에 뛰어들었다. 오리지널의약품 제조사와의 특허공방, 약가경쟁, 블록버스터 약품 감소 등의 한계까지 겹치면서 레드오션이 되는 분위기가 됐다. 매출 및 영업이익 등 실적이 확대되고는 있지만 증가율은 떨어지는 추세다. 실적 변동성도 심화되고 있다는 점도 불안요소다.
이런 상황에서 신성장동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일단 서 명예회장이 은퇴 직전 강조했던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개발에서 갈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당장 코로나19 치료제 '렉키로나'의 개발 중단으로 360억원의 회계적 손실을 봤다. 개발비로 1500억원이 투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회비용을 고려한 손실은 더 크다는 진단이다. 백신개발 역시 mRNA 연구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서 명예회장의 공언만 있었을 뿐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항체약물접합체(ADC), 이중항체, 마이크로바이옴, 디지털헬스케어 등 업계서 트렌드가 되고 있는 모달리티(Modality)에 대한 접점을 넓히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영국 ADC 개발사인 익수다테라퓨틱스와 국내 피노바이오 등에 유의미한 지분투자를 단행했다. 미래에셋을 끌어들여 공동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서 명예회장의 장남인 서 의장이 직접 진두지휘하는 사업으로 과민성 대장 증후군 환자 관리 애플리케이션 등을 출시했다.
이들 신성장동력은 서 의장이 주도한다. 그는 서울대 농생명과학대학의 동물자원학과(현 동물생명공학전공) 학사와 카이스트 나노과학기술대학원 석사·박사를 졸업한 바이오 전공자다. 디지털 헬스케어는 서 의장의 최근 관심사가 반영됐다.
하지만 이 같은 전략이 시장의 신뢰를 얻는 데 역부족이었다. 셀트리온이 추진하는 신약 및 디지털 헬스케어 전략은 이미 타사도 진행하고 있는 소위 유행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주류에 편승한다는 정도의 의미만 있을 뿐 이렇다 할 '한방'이 없다는 평가였다. 신약개발에 10여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방향성에 대한 시장과의 소통 및 공감대도 없었다.
◇3사 합병위한 '주주' 설득 과정 필요…공동의장직 '일시적' 역할에 방점사실상 셀트리온그룹 미래의 분명한 방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제기됐다. 이를 전략의 문제라고도 진단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서 명예회장의 후계자인 서 의장의 리더십 때문으로 보기도 했다. 온순한 학자 스타일의 서 의장은 불도저와도 같은 서 명예회장의 리더십과 비교됐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구조 개편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건 상당한 부담이 됐다. 수많은 소액주주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그 과정에 셀트리온그룹이 그리는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공감대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를 그릴 전략가도, 소통에 나설 리더도 부재했다. 3사 합병안이 나온 지 3년이 됐지만 아직도 그림조차 그리지 못한다는 건 시장을 설득할 무기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결국 강한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에서 서 명예회장이 복귀에 대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는 '소방수' 역할이 필요한 위기의 상황이 지금 이 시점이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만 단독 의장이 아닌 '공동의장'이라는 다소 애매한 역할로 복귀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어디까지나 서 명예회장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임시'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후계자인 서 의장의 리더십을 키우고 그룹을 제 2의 반석에 올려놓는 시점에 일시적으로 등판한다는 의미인 셈이다.
셀트리온그룹 관계자는 "글로벌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다"며 "그룹사 전체를 콘트롤해야 하는 상황에서 서정진 명예회장이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